그래함, 헐버트, 마틴 루터 킹, 포사이스… 美 선교 투어 중 만난 ‘작은 예수’ 8인의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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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재 선교사의 ‘아프리카에서 온 편지’ 안식 (13) 작은 예수 묵상

▲빌리 그래함 라이브러리.

▲빌리 그래함 라이브러리.

미국 선교 투어를 통해 만난 작은 예수들의 한마디 말을 함께 묵상하고 싶다.

1. 룻 그래함(Ruth Graham, 1920-2007)

“공사 끝. 참아 주셔서 감사합니다(End of Construction. Thank you for your patience)”

노스캐롤라이나 샬럿에 있는 빌리 그래함 라이브러리에 묻힌 빌리 그래함의 아내 룻 그래함의 묘비에 새겨진 글이다. 중국 선교사의 딸로 태어나 평양에서 3년간 고등학교를 다녀 우리 민족과도 인연을 맺은 그녀는 2007년 87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빌리 그래함과 룻이 함께 묻힌 묘소. 왼쪽은 아내 룻 그래함 소개 설치물.

▲빌리 그래함과 룻이 함께 묻힌 묘소. 왼쪽은 아내 룻 그래함 소개 설치물.

위트가 넘치는 그녀의 묘비는 우리 일생이 건축 과정이라는 것, 건축은 언젠가 끝날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 건축은 많은 사람의 도움과 인내로 이루어지는 평생의 과정임을 가르친다. 그녀는 또한 남편의 내조자로서 ‘빌리를 사랑하는 것은 내 일이고, 빌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도 남겼다.

▲헐버트가 공부한 뉴욕 유니언 신학교.

▲헐버트가 공부한 뉴욕 유니언 신학교.

2. 호머 헐버트(Homer B.Hulbert, 1863-1949)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einter Abbey)”

그는 한국 최초 근대식 교육 기관인 육영공원 3인 교사 중 하나로, 1886년 5월 한국에 입국했다. 벙커(Dalzell A. Bunker), 길모어(George W. Gilmore)와 헐버트는 뉴욕의 유니온신학교에서 같이 공부했다. 헐버트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선교사’였다. 그는 한글을 사랑했고, 한국의 독립과 교육, 국권을 위해 봉사와 헌신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1949년, 86세로 별세해 양화진에 묻혔다.

3. 루비 켄드릭(Ruby Kendrick, 1883-1908)

“내게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모두 한국을 위해 바치리라(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

미국 텍사스에서 출생한 루비는 1907년 한국에 와 개성에서 선교를 했다. 짧은 시간 선교한 그녀는 과로로 사망했으나, 한국과 선교를 너무 사랑한 선교사였다. 그녀는 죽어가면서 자신이 한국에 가면 위험하다고 말린 부모님께 편지를 남겼다.

“아버지, 어머니, 어쩌면 이 편지가 마지막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 오기 전 뒤뜰에 심었던 한 알의 씨앗이 자라 이제 내년이면 온 동네가 꽃으로 가득하겠지요. 그리고 또 다른 씨앗을 만들어 내겠지요.

▲한국에 파송됐던 선교사들이 모여 있는 블랙마운틴 모습.

▲한국에 파송됐던 선교사들이 모여 있는 블랙마운틴 모습.

저는 이곳에서 작은 씨앗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제가 씨앗이 되어 이 땅에 묻히면, 조선 땅에는 많은 풀들이 피고 그들도 여러 나라에서 씨앗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 땅에 저의 심장을 묻겠습니다. 저는 조선을 향한 저의 열정이 아니라, 조선을 향한 하나님의 열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사랑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일 내가 죽거든 텍사스 선교본부에 연락해서 청년들 열 명, 스무 명, 수십 명이 나를 대신하여 이 한국에 오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유언을 듣고, 그 자리에서 20명 미국 청년들이 한국 선교사로 자원했다.

4. 헨리 아펜젤러 2세(Henry D. Appenzeller, 1889-1953)

“나는 한국 땅에 묻히고 싶습니다. 나를 내 아버지의 땅 한국에 묻어 주세요(I want to be buried in Korea. Please bury me in Koreaq, my father’s land)”

아펜젤러의 아들인 헨리는 1889년,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을 고향으로 삼았다. 1902년 13살 때 갑자기 아버지를 잃은 헨리는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 왜 44세의 젊은 아버지를 제게서 빼앗아 갔습니까”라고 소리쳤지만, 슬픔을 딛고 다시 아버지의 길을 따르기 위해 아버지가 공부한 마셜대학, 드류신학교를 졸업한 후, 한국에 와서 배재학교 교장으로 일하다 1953년 미국에서 별세했다. 그는 죽기 전 아버지가 헌신하고 순교한 한국에 묻히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5. 리니 데이비스(Linnie F. Davis, 1962-1892)

“가라. 천국에서 만나자(Go, see you in heaven)”

언더우드의 설교를 듣고 선교를 결단한 후 호남 지역으로 떠난 7인의 선교사 중 하나였던 리니 데이비스는 일찍이 남편을 잃고 홀몸으로 딸을 키운 어머니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이 사실을 안 어머니는 딸 리니 데이비스를 불러 말했다.

▲유진 벨의 증손자 제임스 린튼과 함께.

▲유진 벨의 증손자 제임스 린튼과 함께.

“데이비스야, 나 때문에 네가 조선 땅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우리 다시 천국에서 만나자.” 어머니와 헤어진 데이비스는 조선을 향해 떠나는 배에서 눈물을 흘리며 올랐다. 그러나 그가 한국에 온지 9일만에 어머니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천국에서 만나자는 어머니의 말을 기억하며 20년간 군산 지역에서 병든 아이들과 부인들을 돌보다, 열병에 걸려 1903년 41세 나이로 별세했다. 양화진에 있는 그녀의 묘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날이 새고 흑암이 물러갈 때까지.”

6. 마틴 루터 킹(Martin.L.King, 1929-1968)

“무언가를 위해 죽지 않으려는 사람은 살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이다(A man who won’t die for something is not fit to live)”.

애틀랜타에 있는 마틴 루터 킹 박물관은 이른 아침부터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는 링컨 이후 흑인 민권을 위해 살다 안타깝게도 총에 맞아 숨졌다. 그의 무덤이 바라보이는 벤치에서 나는 그의 몇 마디 말을 묵상했다.

▲마틴 루터 킹 교회 및 무덤.

▲마틴 루터 킹 교회 및 무덤.

“인생 목적은 행복해지는 것도, 즐거움을 얻는 것도, 고통을 피하는 것도 아니다”, “한 사람에 대한 궁극적 평가는 편안하고 안락한 순간에 그들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도전과 논란의 순간에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이다”.

아모스의 말대로 공의가 하수처럼 흐르는 물 위에 모셔진 그와 부인의 무덤에는 그의 세기적 명연설, “I have a dream”의 마지막 구절이 새겨져 있었다. “드디어 자유가, 드디어 자유가, 전능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마침내 자유로워졌나이다(Free at last! Free at last! Thank God Almighty, we are free at last)!”

7. 포사이드(W.H. Forsythe, 1873-1918)

“지팡이를 들어 주세요(Please pick up the stick)”.

포사이드는 1873년 미국 켄터키에서 태어나 루이빌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남장로교 선교부 파송으로 호남 지역에서 선교했다. 그가 광주기독병원 전신인 제중원에서 환자를 돌보던 어느 날, 길을 지나다 길가에 쓰러진 여자 나환자(한센병)를 보게 됐다.

▲마틴 루터 킹 교회 및 무덤.

▲마틴 루터 킹 교회 및 무덤.

마침 청년 최흥종이 동행하게 됐는데, 포사이드가 흉측한 나환자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부축해 말 위에 태우려는 순간 환자가 지팡이를 떨어지자, 최흥종에게 그것을 집어주기를 부탁했다. 그러나 믿음이 없던 최흥종은 썩은 송장이나 다름 없고 남은 손가락마저 문드러져 피고름으로 범벅이 된 지팡이를 집을 수 없었다. 그때 포사이드는 말에서 내려 자신의 외투를 벗어 그에게 입히고 그를 말에 태워 광주로 돌아왔다.

이 광경을 목격한 최흥종은 큰 충격을 받고 후에 회심하여, 가난한 자들과 나병환자들을 사랑하는 민중의 아버지가 되었다. 포사이드는 그후 진료 중 과로로 쓰러졌으나, 그 희생의 뿌리에서 여수 애양원이 생겨났다.

8. 서서평(Elisabeth Johanna Shepping, 1880-1934)

“나는 내가 내일 먹기 위해 오늘 굶는 사람을 못본 척할 수 없으며, 내 옷장에 옷을 넣어 두고 추위에 떠는 사람을 버려둘 수 없다”.

1912년 미국 남장로교 파송 간호사로 한국에 온 엘리자베스 쉐핑(Elisabeth J. Shepping)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녀는 몸이 아파도 강의했고, 죽는 날까지도 누워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녀는 풍족하게 살 수 있는 선교비를 후원받았음에도 영양실조로 죽었다.

그녀는 일생 무명베옷을 입었으며, 고무신을 신고 보리밥에 된장을 먹고 살았다. 그녀는 죽기 전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내가 호흡을 거두자마자 내 시체를 해부해서 연구 자료로 삼으세요.”

▲한복을 입은 서서평.

▲한복을 입은 서서평.

유품을 정리하던 친구가 그녀의 노트를 발견했는데, 거기에 좌우명이 적혀 있었다. “우리 삶의 목적은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 그녀는 일생 가난한 한국인을 가르치며 살았던 빈민의 어머니였다.

우리는 이들에게 모두 빚을 졌다. 그들은 부유한 나라를 떠나, 가난한 우리에게로 왔다. 예수님을 직접 닮기 어렵다면, 예수님을 닮은 이들을 닮을 수 없을까? 그들은 우리에게 작은 예수였다. 이제 우리가 작은 예수가 되어 우리를 필요로 한 사람들에게 가야 하지 않을까?

▲이윤재 선교사 부부.

▲이윤재 선교사 부부.

이윤재 선교사

우간다 쿠미대학 신학부 학장
Grace Mission International 디렉터
분당 한신교회 전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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