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록, 한 점의 그림] 안재기, 생명의 불꽃으로
생명의 원천, 뿌리의 존재에서
보이지 않는 힘 보여주는 기능
죽은 것 되살리는 예민한 감성
유용성 넘어 이해와 교감 발전
땔깜이나 목재 아닌 신의 지문
영원한 샬롬 맛보는 언약 기반
조각가 안재기는 우람한 나무밑동을 깎고 다듬어 거기에 ‘의미의 자락’을 추가하는 작가이다. 작가가 선택한 나무 밑동은 지면 아래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평상시 우리는 그 존재를 잘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가 그 존재를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지상으로 드러날 때뿐이다. 작가의 시선은 바로 이 순간에 맞추어져 있다.
나무 밑동의 이미지가 환기시키는 것은 일차적으로 존재의 궤적이다. 나무는 그동안 무성한 열매와 잎사귀를 내며 그 나름의 의미 있는 삶을 살아왔다. 새가 쉬어가고 열매는 여러 야생 동물들에게 식량으로 제공되었으며 그늘은 나그네에게 쉴 자리를, 운 좋게 목수를 만나 멋진 가구로 빛을 보기도 했다. 아이들은 나무에 오르거나 그네를 타며 즐거운 시간을 갖기도 했을 것이다. 수명을 다해 지상에 떨어진 잎새들은 기름진 토양을 만들어 숲의 푸르름을 더해주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그 나무의 비밀을 알지 못하지만, 작가는 그 비밀의 열쇠를 나무 뿌리에서 찾는다. 생명의 원천이 바로 ‘뿌리의 존재’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만일 뿌리가 수분을 흡수하여 몸통으로 실어 나르지 않았다면 나무 자체의 존립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뿌리의 기능에 대해 다른 주장도 있다. 9.11 테러가 일어났을 때 뉴욕 무역센터의 주변 건물이 손상을 입거나 붕괴되었지만, 맨해튼의 세인트 폴 예배당은 어떤 손상도 입지 않았다. 과학자들이 조사해 보니 예배당 건물 옆의 플라타너스 나무가 무역센터가 붕괴될 때의 충격을 흡수해 예배당의 피해를 막아주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나무를 세인트 폴 예배당을 구한 ‘기적의 플라타너스 나무’로 불렀고, 이를 기념해 ‘트리니티 루트’라는 조형물을 세우기도 했다.
안재기가 뿌리를 통해 전달하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영양분을 끌어들이는 역할이었을까, 아니면 지반을 단단하게 해주는 역할이었을까. 그의 의도는 이런 것과는 궤를 달리한다. 보다 심층적인, 본질적인 의제에 그의 관심이 모아진다.
“뿌리의 기능은 보이지 않는 것의 힘을 보여주는 데 있다.” 작가는 보이는 것만이 모든 것이 아니며 그 배후의 세계가 자리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작가는 작품에 ‘생명길’, ‘생명문’, ‘생명향’이란 타이틀을 달았다. 사물의 상태나 움직임을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수사법을 메타포라고 부를 때, 그의 작품은 모든 생명체가 추구하고 갈망하는 것을 창작의 범주 속으로 수렴한다.
이미 사망선고까지 받은 나무 밑동은 작가에 의해, 이제 생명이 수혈되어 새로운 존재, 즉 ‘생명의 불꽃’이 타오르는 이미지로 재탄생한다. ‘생명의 양식’을 갈망하고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며 ‘생명의 향기’가 나는 ‘생명 충일한 존재’로서 말이다.
그의 작품을 볼 때 맨 먼저 마주하는 것은 존재의 반전이다. 그 자연물들은 작가의 선택이 없었다면 익명의 존재, 곧 어떤 시선이나 관심도 받지 못하는 물체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죽은 것을 되살린 것은 일상의 어떤 것도 허투루 대하지 않는 작가의 예민한 감성 내지 이해력이 작동했기 때문이리라. 그것은 소정의 절차를 거쳐 이제 죽은 나무가 아니라 의미내용을 갖춘 어엿한 예술품으로 조형의 바다에 진수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작가가 나무 밑동을 대할 때 주제적 측면에만 집중한 것은 아니다. 작가는 물상의 색깔과 형태, 윤택과 촉감에서 어떤 감각의 기쁨과 쾌감을 느끼고 부분적으로 자르고 다듬고 고쳐 이를 재탄생시킨다. 가만히 보면 그것들은 고유의 피부를 자랑할 뿐만 아니라 색감, 무늬, 형체 면에서 어디 흠잡을 데가 없다.
그러나 작가는 나무의 기본 구조를 무리하게 바꾸거나 변형시키는 일은 자제하고 있다. 움푹 파이고 휘어지고 뭉치며 삐져나온 형태감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작가가 구상한 형태와 구조를 제외하고 원래의 나무(향나무, 은행나무, 참죽나무, 느티나무, 오동나무 등)가 지닌 무늬나 색깔, 향을 보존하고자 했다.
작가에 따르면 나무를 다룰수록, 더 목재의 매력에 사로잡힌다고 한다. 주의를 기울여 보면 물리적 대상도 ‘유용성’을 넘어 ‘이해’와 ‘교감’, 그리고 ‘친화’의 단계로 발전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누구에게는 ‘땔감’이나 ‘목재’로 받아질 법한 것을, 작가는 그 속에서 ‘신의 지문’을 발견한다. 여기에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창조주의 존재를 알게 해주고 그의 솜씨와 능력과 아름다움을 깨닫게 해주는 계시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예술품의 존재와 성격을 설명하는 데 있어 주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작가의 의식 상태, 곧 설명할 수 없는 것의 발견에서 평소에 지닌 신념과 확신과 목표까지 그 범위가 넓은 편이다. 미학자 니콜라스 월터스토프(N. Wolterstorff)는 이것을 ‘작품의 이면 세계(the World behind the Work)’라고 불렀다.
물론 예술이 인간의 삶 속에서 갖는 다른 풍부한 연관성도 간과해서는 안 되지만 예술 작품과 예술가의 신념 사이에는 뚜렷한 연관성이 있게 마련이다. 이런 이면 세계는 작가의 창작행위와 작품내용을 형성하는 중핵적인 요소가 된다.
안재기의 경우 예술의 근간을 종교적 삶, 구체적으로 기독교 정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런 높은 가치들이 작품 형성 과정을 관통하고 있다. 작가가 나무 밑동을 일개 자연물로만 인식하지 않고 거듭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빛의 무한한 근원에서 충만한 빛이 발산되어 사방에 비추어지듯, 현재는 우리가 시련과 고통을 받고 있지만 하나님의 은총으로 언젠가는 ‘영원한 샬롬’을 맛보게 될 것이라는 언약적 기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세상에 비전을 주고자 하는 그의 소망은 작품 내부에 전달되어 생명의 찬가를 낳는다. 그것은 뭐랄까, 태양이 햇빛을 끊임없이 비추는 것처럼 어떤 리듬에 실려 세상에 잔잔히 울려 퍼진다. 이를 체험한 사람은 전율한다. 이 지점에서 안재기 작가는 기쁨의 관찰자가 아닌 참여자로 바뀐다.
이때의 기쁨에 대해 부언하자면, 어떤 쾌감보다 깊고 넓으며, 총체적 선에 대한 인격적 반응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시편 기자 역시 비슷한 감정을 표현한 적이 있다.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이 땅에 가득하나이다(시편 104:24).” 그의 작품은 온 몸으로 부르는 노래이자 고백이다. 우리는 그에게서 생명과 진리를 추구하는 예술가의 모습을 본다.
오늘도 작가의 작업실에서는 끌과 망치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어떤 때는 이른 시간에 시작하여 밤늦도록 이어지기도 한다. 그의 작업은 이 땅에 가득한 생명을 찬미하는 예전(禮典)과 같은 것이다. 그는 사랑하는 일, 즉 깎고 다듬는 일을 통하여 일상의 예전에 참여한다.
서성록 명예교수
안동대 미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