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재 선교사의 ‘아프리카에서 온 편지’ 안식 (14)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켄터키 옛집’, 동정심 갖게 해
아프리카 선교 중 들녘 볼 때면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불러
미국의 오늘날 부, 노예들 공헌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도 원죄
MAGA만 외쳐선 안 되는 이유
메릴랜드에서 테네시로 넘어오자, 자연환경이 크게 달라졌다. 여기저기 건물만 보다가 시원하게 펼쳐진 들을 보자 마음이 탁 트였다.
미국 서쪽을 남북으로 흐르는 로키 산맥과 동쪽 애팔래치아 산맥 한가운데 있는 넓은 대평원에 들어섰다. 미국인 폴 부부와 함께 켄터키에 있는 ‘노아의 방주’를 보기 위해 길을 떠났을 때, 정말 미국의 평야가 얼마나 넓은지 놀랐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대평원은 이제 막 가을걷이를 끝내고 겨울을 준비하고 있었다. 켄터키 한복판을 지날 때 노래 하나가 떠올랐다. ’켄터키 옛집(My Old Kentucky Home)‘이라는 노래다.
켄터키 옛집에 햇빛 비치어
여름날 검둥이 시절
저 새는 긴 날을 노래 부를 때
옥수수는 벌써 익었다
마루를 구르며 노는 어린 것
세상을 모르고 노나
어러운 시절이 닥쳐 오리니
잘 쉬어라 켄터키 옛집
잘 쉬어라 쉬어 울지 말고 쉬어
그리운 저 켄터키 옛 집 위하여
머나먼 집 노래를 부르네
이 노래는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선생님께 배운 노래다. 아직 싱글이었던 여선생님은 방과후 나와 내 친구를 풍금 옆에 세우고 이 노래를 불렀다. 그때 함께 배웠던 노래가 ‘올드 블랙 조’, ‘스와니 강’, ‘오 수재너’,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등이었다.
시간이 지나 선생님은 가셨지만, 그가 남긴 노래만은 여전히 내 마음에 남아 있다. 이 노래들은 어린 시절 나에게 미국이란 나라에 대한 동경과 함께, 드넓은 농장에서 일하는 흑인 노예들에 대한 동정심을 갖게 했다.
때가 되어 아프리카 선교를 나왔을 때, 이 노래가 내 마음에 다시 맴돌았다. 아프리카 들녘을 볼 때마다,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를 부르며 이곳에서 노예로 잡혀간 이름 모를 수많은 아프리카 사람들을 떠올렸다. 내가 사는 빅토리아 호수는 이 노래의 배경에 딱 어울리는 곳이다.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오곡백화가 만발하게 피었고
종달새 높이 떠 지저귀는 곳
이 늙은 흑인의 고향이로다
내 상전 위하여 땀 흘려가며
그 누런 곡식을 거둬들였네
내 어릴 적 놀던 내 고향보다
더 정다운 곳 세상에 없도다
여기 나오는 표현은 정확하게 아프리카 자연 환경을 표현한다. ‘오곡백화가 만발하고, 종달새가 지저귀고’. 2절은 더 분명하게 아프리카, 특히 빅토리아 호수의 자연을 보여준다.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이 몸이 다 늙어 떠나기까지 그 호숫가에서 놀게 하여주 거기서 내 몸을 마치리로다. 미사와 마사는 어디로 갔나’.
아마 이 노래의 주인공은 아프리카 어느 호숫가에서 가족(미사와 마사)과 함께 살다가 누군가에 의해 미국에 노예로 팔려갔는지 모른다. 이제 몸은 늙고 병들어 죽을 일만 남았지만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아프리카의 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나는 빅토리아 호수에서 실제 노예들이 잡혀간 흔적들을 보았다. 탄자니아 부코바 항구가 그 중 하나다. 부코바는 빅토리아 호수 근처의 많은 아프리아인들을 노예로 잡아 집결시킨 곳이다. 그때 잡힌 사람들은 탄자니아 잔지바르 섬으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그들은 대서양을 건너 유럽이나 미국으로 팔려갔다.
지금도 잔지바르에는 이들이 가두었던 방과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쇠고랑이 역사적 유물로 남아 있다. 그때 그들이 얼마나 심한 고통을 겪었는지는, 1811년 그들을 잔지바르 노예시장에서 목격한 한 서양인이 남긴 글에도 잘 나타난다.
“노예로 붙잡혀 온 흑인들은 입과 이빨들을 검사받는다. 여자들은 가슴도 체크된다. 걷거나 뛰기도 한다. 신체가 건강한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그리고 가격이 매겨진다. 새 주인이 그들을 데려간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이나 제대로 걷지 못하는 노인들은 방치된 채 험하게 다뤄진다. 그들은 우울해 보였고, 제대로 먹지 못해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1750년대에는 미국 식민지 거주민의 약 25%가 아프리카 노예였다. 1500년대에서 1800년대까지 유럽인들은 약 1,200만 명의 아프리카 노예를 미국에 팔았다. 미국으로 오는 도중에 사망한 흑인도 200만 명이나 되었다.
노예로 팔려온 그들은 대부분 농장에서 힘들게 일했다. 그들은 날이 밝으면 밖에 나가 뙤약볕에서 일했고, 저녁이 되면 힘없이 돌아왔다. 이들은 대부분 극도의 열악한 환경에 살았고, 한 방에 다섯 명에서 열 명이 함께 살았다.
남부 식민지의 법들은 대부분 이들의 결혼, 재산 소유, 자유 등을 불법으로 간주했고, 심지어 교육도 받지 못하게 했다. 주인들은 노예들에게 일을 시키기 위해 심한 벌을 주었고, 구타, 굶기기, 심한 경우 목을 매달아 죽이거나 산 채로 불에 태우는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오늘날 미국의 부를 만들어 준 대부분의 공이 아프리카 노예들이라는 것과, 이들을 노예로 부렸던 대부분의 남부 지역이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 본거지라는 것은 역사의 슬픔이다. 이것이 미국교회가 아직도 회개할 이유 중 하나다.
미국은 어떤 상황에서도 아메리카 원주민을 학살하고 아프리카 노예들을 학대한 두 가지 큰 원죄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죄를 회개하기 위해서라도, 미국은 자국의 번영만을 바라는 ‘Make America Great Again’을 소리 높여 외쳐서는 안 된다.
미국인 폴이 모는 차는 어느덧 켄터키 넓은 평원을 질주하고 있었다. 창밖에 펼쳐진 평원의 어디선가 멀리, 아프리카에 늙은 부모와 어린 자녀를 떼어놓고 낯선 땅에 끌려와 중노동하는 아프리카 노예들의 신음이 들리는 듯했다.
일찍이 알버트 슈바이처는 자기 조국 독일이 유대인들에게 했던 만행을 속죄하고자 아프리카로 떠났다. 오늘날 미국 교회는 아프리카 영혼들에게 속죄하기 위해 무엇을 하는가?
이 땅 모든 노예들이 영혼의 고향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와 자유를 얻기까지, 그들을 묶은 쇠사슬에서 그들을 풀어내야 한다. ‘Freedom is not free and set the people free(자유는 거저 온 것이 아니다. 묶인 사람들을 자유케 하라)!’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자유를 얻은 우리가 이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이윤재 선교사
우간다 쿠미대학 신학부 학장
Grace Mission International 디렉터
분당 한신교회 전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