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세계, 그림으로 선포하다
사제 출신 독일 화가 지거 쾨더
유한한 인간 생각과 지식 너머
성경 재현 넘어 생각 못한 시선
구레네 시몬과 어깨동무한 예수
하나님, 오므려 편 손으로 묘사
28인 해설, 네비처럼 길 안내해
지거 쾨더, 성서의 그림들
게르트루트 비드만 엮음 | 유명철·이호훈 역 | 사자와어린양 | 376쪽 | 33,000원
“크리스마스로즈는 가장 높은 곳에서 환한 빛을 내고 있습니다. 춥고 시린 겨울밤에 피는 이 꽃은 이새의 혈통인 예수님의 뿌리를 노래하는 성탄 찬송을 떠오르게 합니다. 이 작품을 볼 때면 다음과 같은 감정들이 올라옵니다. 따스함, 안전함, 평온함, 그리고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헌신의 마음입니다.”
성화(聖畵)를 감상하는 이유는 각자 다양하겠지만, 단순히 성경(聖經) 말씀을 있는 그대로 충실히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작가만의 깊고 독특한 시각을 담아 재구성한 작품들을 보고 싶어하는 성도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독일의 사제 출신 화가 지거 쾨더(Sieger Köder, 1925-2015)의 작품들이 그렇다. ‘현대 종교미술의 거장’으로 불린 쾨더는 유화, 스테인드글라스, 판화 등 다양한 미술 기법을 활용해 우리가 익히 알던 성경 내용을 새롭게 보여준다.
지거 쾨더는 오랜 기간 미술 교사로 일하다 40세쯤부터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해, 사목 활동을 하면서 작품 활동을 병행하며 ‘그림으로 강론하는 사제’로 불렸다.
<지거 쾨더, 성서의 그림들(Die Bilder der Bibel von Sieger Köder)>은 그의 작품 103점에 신학자·목회자·상담가 등 다양한 그의 ‘벗’ 28인이 해당 그림에 대한 묵상과 설명을 ‘레시피’처럼 글로 엮은 책이다.
책에는 구약 47점(집회서 1점 포함), 신약 56점 등 웬만한 성경 내용은 다 들어 있다. 겟세마네의 기도 가운데 잠든 제자들의 모습처럼 때로는 적나라하게, 한 어린 복사(성직자의 집례를 보좌하는 어린이)가 길다란 촛대를 지렛대 삼아 담장을 넘어 장대높이뛰기를 하듯 날아가는 모습처럼 때로는 재미있게,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한 아가서 그림처럼 때로는 강렬하고도 따뜻하게 묘사한 그림들이 눈길을 잡아끈다.
아무래도 가장 강렬하고 상징적인 작품을 선택했을, 책 표지에 나온 그림부터 인상적이다.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다던 구레네 시몬과 예수가 마치 어깨동무를 하는 듯 십자가를 ‘함께’ 메고, 둘이 같은 표정으로 감상자를 바라보는 듯한 모습. 신학자이자 심리치료사인 마르타 존탁은 이에 대해 “예수님이 고통받는 사람, 즉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과 맺은 연대를 이보다 명확히 표현한 작품을 알지 못한다”고 표현했다.
“너의 자손이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있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장엄하고 비장하다. 어두운 밤중에도, 한 큰 별빛을 직통으로 받은 그의 얼굴에선 빛이 난다. 좀 전에 봤던 예수님과 구레네 시몬과도 비슷해 보이고, 별을 보고 아기 예수 탄생지로 향하는 박사들 모습 같기도 하다.
쾨더의 작품에서 하나님은 한데 모아 오므려 편 두 손바닥으로 묘사된다. 없는 듯 있는 그 손은 야곱이 꿈에서 본 사닥다리에서도 보이고, 아이와 함께 있는 어머니가 새겨져 있는 손금에서도 보인다. 다른 유명한 그림에서 새 순이 솟아나는, 말라죽은 그루터기도 그분의 손 같다.
피자 조각처럼 나뉜 빵을 중심으로 모인 제자들의 모습을 그린 ‘마지막 만찬(눅 22:19)’에서도 식탁의 주인이신 예수는 두 손과 잔에 비친 얼굴만 보인다. 보이지 않지만 우리와 늘 함께 계시는 그분의 손길을 느껴야 한다는 의미일까.
어릿광대와 매춘부, 눈먼 노파와 젊은 지식인, 유대교 랍비와 로마 귀족 여인, 아프리카인 부상병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이 한 식탁에 둘러앉아 있는 기묘한 작품의 본문은 ‘죄인과 함께 하는 식사(막 2:16)’이다.
이 작품 맞은편에서 사랑의 빵을 건네는 (손만 보이는) 집주인의 시선을 비롯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바라보는 시선, 우물 속에 비친 누군가를 바라보는 사마리아 여인의 모습, 빈 무덤을 덩그러니 보여주는 모습까지, 쾨더의 작품은 전복적 시선으로 성경을 다시 한 번 새롭게 읽을 수 있음을 독자들에게 알려주는 듯하다.
작품만 덩그러니 있었다면 감상이나 묵상을 하다 자칫 길을 잃을 수도 있겠지만, 관련 성경구절에 설명까지 함께 있으니 네비게이션을 장착한 느낌이다. 어떤 작품은 글이 먼저 나오고 어떤 작품은 그림부터 등장하는데, 순서를 꼭 맞출 필요는 없어 보인다.
번역을 맡은 교회교육현장연구소 소장 이호훈 목사(예수길벗교회)는 “작가는 ‘성서 이야기’를 그리며 작품 속에 하나님의 모습을 숨겨 놓았다. 독자들은 그림 어디에서도 또렷한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다”며 “하지만 우리는 이 책의 모든 작품 속에서 주님을 발견할 수 있다. 책을 펼쳐 든 이들마다 유한한 인간의 생각과 지식 너머에 계신 영원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성탄을 소재로 한 사랑스러운 그림들도 여럿 있어, 연말연시 선물용으로도 괜찮다. 물론 사순절과 부활절 등을 그린 작품들도 있다. 맨 윗문단은 미가 5장 2절,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하는 말씀을 토대로 한 작품 소개로, 글을 쓴 한스 나겔 사제는 말한다.
“이 작품은 대림절을 위한 그림으로, 크리스마스 준비로 바쁘고 분주한 시간에도 아기 예수님의 평온함 가운데 머물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그대여, 그대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나요? 그분이 묵을 숙소를 찾으며 당신 집 문을 두드릴 때 열어 줄 준비가 되어 있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