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화가 피테르 브뤼헐의 두 작품
<베들레헴의 인구조사>
가장 익숙한 곳을 탄생지로
조감도적 다양한 인간군상
<눈 속의 동방박사의 경배>
핍박받던 땅으로 오신 예수
성도들 절실한 소망 담아내
피테르 브뤼헐(Pieter Brugel the Elder, 1526-1569)은 북유럽 르네상스를 이끈 화가 중 한 명이다. 당시 그가 태어난 네덜란드는 스페인 점령 하에서 모진 핍박을 받았고, 점령국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에게 과도한 세금을 바쳐야 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스페인 펠리페 2세가 네덜란드의 종교적 자유를 허용치 않는 데 있었다. 펠리페 2세는 누나 마르가리타를 내세워 종교 비관용 정책을 지속했으나, 네덜란드의 프로테스탄트 신자는 불어났고 스페인에 대한 저항은 갈수록 거세졌다.
그러던 중 1566년 일군의 칼빈주의자들이 가톨릭교회에 설치된 이미지와 조각을 훼손하는 이른바 ‘벨덴스톰(Beeldenstorm)’을 일으켰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펠리페 2세는 알바공(Daque de Alba)을 파견해 칼빈주의자들과 개신교인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Carlos M. N. Eire, War Against the Idol, the Reformation of Worship from Erasmus to Calvi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6, 280쪽).
칼빈주의자들의 행동은 단순히 신학적 논쟁을 넘어,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갈등 및 불만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신임 총독 알바공은 저항세력을 소탕할 계획으로 종교 재판소에서 1만 8천여 명을 살해하는 공포정치를 펼쳤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네덜란드 독립 운동을 촉발시켜 ‘80년 전쟁’의 도화선이 되고 말았다.
피테르 브뤼헐은 스페인의 만행을 알리는 그림을 남기진 않았지만, <바벨탑>과 같은 작품에서처럼 인간의 권력은 영원하지 못하며 언젠가는 무너진다는 사실, <유아 학살>에서 스페인 기마병들이 저지대 주민들의 아이들을 살해하는 끔찍한 장면을 그리기도 했다. 성경을 통해 인간의 오만함과 스페인의 만행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이러한 엄혹한 시대에, 화가는 성탄의 의미를 어떻게 보았을까? 여기서는 스페인의 네덜란드 박해가 최고조에 달했던 무렵에 그가 제작한 <베들레헴의 인구조사>(1566)와 <눈 속의 동방박사의 경배>(1567)를 살펴보려고 한다.
<베들레헴의 인구조사>는 성경 기록대로 로마 황제 가이사 아우구스투스에게서 “천하로 다 호적하라(눅 2:1)”는 칙령을 받은 시리아 총독 구레뇨(Quiinius) 주관으로 유대 지방에서 이루어진 인구조사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로마 황제는 당시 세금을 더 많이 거두어들이기 위해 유대 주민들과 그들의 재산을 등록하게 했다.
다윗의 자손 요셉이 만삭의 아내 마리아와 함께 갈릴리를 떠나 남쪽 유대 지방 베들레헴에 도착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림은 요셉과 마리아가 해질녘 베들레헴 마을에 도착한 순간을 담고 있다.
요셉과 마리아는 무려 150km나 되는 먼 거리를 여행했다. 마리아는 나귀에 앉아 지친 기색에 눈을 감고 있고, 요셉은 긴 톱을 메고 여관에서 호적을 등록하는 인구조사관에게로 향한다. 성(聖)가족 뒤로는 예수님이 탄생하는 허름한 마구간이 보인다.
이 그림은 몇 가지 측면에서 흥미로운데, 첫째는 베들레헴이 아니라 저지대 지방을 무대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브뤼헐은 그에게 가장 익숙한 곳을 예수님의 탄생지로 삼았고, 그속에 눈 덮인 마을과 주민들, 그리고 요셉 가정을 위치시켰다.
둘째는 주제의 명확성에 비해 구도가 산만하다는 것이다. 브뤼헐의 화면 구성은 독특하다. 중심 인물이 없거나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는 수법을 애용한다. 특히 광활한 공간에 조감도적 시점을 접목시켜 다양한 인간 군상을 배치하는 것은 피테르 브뤼헐의 조형적 특징이다.
화면은 S자 구도를 취해, 마을 건너편 인물들이 빙판을 지나 인구 조사관 앞으로 이동하도록 의도했다. 인구조사의 목적이 세금을 걷기 위한 목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화가가 이 그림에서 세금에 시달리는 저지대 주민들을 통하여 펠리페 2세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려 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브뤼헐이 그림 배경을 저지대로 바꾼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앞서 말한 현실에 대한 비판보다 좀 더 적극적·희망적 함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생각이지만, 그것은 동토의 땅에 왕이 오심을 나타내려 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환란의 시대를 살아가는 저지대 주민들에게 이 그림은 ‘희망의 서광’이 됐을 것이다.
<눈 속의 동방박사의 경배> 역시, 제목을 알지 못한다면 인간 군상으로 직조된 풍속화로 이해될 수 있음직하다. 이 그림은 <베들레헴의 인구조사>처럼 거리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이 그림의 포인트는 좌편 하단 마구간에 있다. 거기서 두 명의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리고 있으며, 다른 흑인 박사는 예물을 들고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중이다.
그런데 화면을 보면 성탄을 축하하는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 동방박사와 그 일행을 제외하고 예수님의 오심을 깨닫거나 반갑게 맞이하는 행인들이 드물다. 종래 성탄 그림은 아기 예수와 부모와 경배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반면, 이 그림에서는 많은 인물들이 자기 할 일을 수행할 뿐이다.
아들 얀 브뤼헐(Jan Brugel the Younger)이 모사한 아버지의 <눈 속의 동방박사의 경배>를 보면, 경배하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보다 담벼락 뒤에서 몸을 녹이기 위해 모인 사람들 수가 더 많다. 어떤 이는 땔감용 나무를 손질하고 있으며, 두 남성은 얼음에 구멍을 내기 위해 나무를 세워 올리고 있다.
이 밖에 추위에 어디론가 바쁜 걸음으로 가는 사람들, 썰매를 지치는 아이와 이를 지켜보는 엄마가 무언가 이야기하는 모습도 눈에 띈다. 들보가 아니라면 곧 허물어질 것 같은 폐허의 로마네스크식 건물은, 이곳이 잔칫집이 아닌 매우 위태롭고 침울한 장소임을 암시한다.
그림을 제작한 1567년은 알바 공작이 네덜란드를 철권통치하면서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을 처형한 ‘피의 법정’을 일으킨 연도에 해당한다. 그림에서도 무장한 병사들이 눈에 띄는데, 시민의 생활을 감시하는 스페인 군인이 맞다면 이야기는 무거워진다. 개신교 신자들과 시민들로서는 무장한 군인들이 주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협적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특히 그들의 만행을 고려한다면 주민들이 느낀 두려움과 공포감은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판 만데르의 지적처럼 가톨릭교회나 국가에 불온한 감정을 공공연히 표현하는 것은 엄한 처벌을 받았으므로, 브뤼헐 또한 이를 각오하고 붓을 들어야 했을 것이다(Walter S.Gibson, Bruegel, 김숙 역, 『16세기 플랑드르 최고의 화가 브뢰겔』, 시공사, 2001, 162쪽).
<눈 속의 동방박사의 경배>는 마냥 즐겁고 낭만적인 그림이 아니다. 화가는 아기 예수를 핍박받는 네덜란드 땅에 오신 것으로 설정했다. 그가 플랑드르에 오신 그리스도에 주목한 것은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무엇보다 가혹한 폭정, 박해, 희망 없음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메시아를 간구했을 테니까. 그런 절실한 소망이 그림 속에 담겨 있는 셈이다.
브뤼헐의 성탄 그림이 발표된 후 450년이 흘렀다. 그런데 2024년 예수 탄생을 맞이하는 우리나라는 어지러운 정국으로 우리 삶과 사회 전반이 요동친다. 모든 것이 삽시간에 혼란에 빠진 듯 칠흑 같은 어둠이 뒤덮고 있다. 안트베르펜의 추위만큼이나 시련의 계절을 통과하는 중이다.
우리의 불순종을 통회하고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으로 이 땅이 치유되고 회복될 수 있기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나라로 재탄생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셨으니, 우리가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게 하소서.
서성록 명예교수
안동대 미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