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땅에서 하늘로 떠난 크리스천들
2024년, 이 땅에서의 달려갈 길을 모두 마치고 기쁨과 영광 충만한 하늘로 떠난 국내외 주요 기독교인들을 소개한다.
올해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세계적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 교수,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예배설교학의 대가 정장복 한일장신대 명예총장 등 신학자들의 소천 소식이 잇따랐다. 아직 한창 나이인 목회자들의 안타까운 떠남도 있었다. 해외 인사들의 경우 사망 일시는 모두 현지시각이다.
베스트셀러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Experiencing God)’, ‘영적 리더십(Spiritual Leadership)’ 등의 저자인 헨리 블랙커비 목사(Henry Blackaby)가 2월 10일 8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헨리 블랙커비 목사는 기독교를 넘어 국가적 리더이자 세계적 연설가로, 백악관과 미국 국방부, 유엔 등 114개국에서 강연을 했고, 포춘 선정 500대 기업의 크리스천 CEO들의 자문을 맡기도 했다.
그 다음 날인 2월 11일에는 기성 총회장을 지낸 손덕용 목사(청주서원교회 원로)가 오후 7시 30분경 향년 91세로 별세했다. 많은 목회자들의 스승이자 선배로 존경을 받아 온 그는 은퇴 후 성광회장, 은퇴목회자 예배공동체인 본부교회 운영위원장 등을 지냈다.
3일 후인 2월 14일에는 정장복 한일장신대 명예총장이 별세했다. 정 명예총장은 이날 자택 인근에서 운동 중 쓰러져 있는 것이 발견됐다. 1942년생인 정 명예총장은 25년 동안 장신대 교수를 역임하면서 80여 편의 저서와 역서를 편찬하는 등 한국교회 예배·설교학의 초석을 놓았다.
한일장신대 총장으로 8년간 재임 후 명예총장으로 추대됐으며, 특히 1981년부터 매년 <예배와 설교 핸드북>을 40년간 펴내 교회력과 성서정과를 소개하며 한국교회 예배와 설교의 발전을 이끌었다.
그 4일 후인 2월 18일 주일 오전에는 한국교회 대표적 원로였던 김명혁 목사(한복협 명예회장)가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은퇴 후 손수 운전해 다니며 전국 작은교회들을 섬겨오던 그는 이날 춘천 한 교회로 설교하러 가던 중 교통사고로 소천받았다.
김명혁 목사는 예장 합신 증경총회장이자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을 오래 지내며 복음주의 운동에 앞장서 왔다. 그는 본지 편집고문으로 오랜 기간 임직원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2월 29일에는 저서 <주께 하듯 하라>로 잘 알려진 대의그룹 회장 채의숭 장로가 86세로 별세했다. 1989년 자동차 부품업체 대의그룹을 창립한 그는 30개국에 교회 100곳 이상을 세웠고, 해외 선교에도 적극 나섰다. 아내와 신학을 공부해 함께 2012년 목사 안수를 받았고, 2016년 국가조찬기도회 제9대 회장에 취임했다.
3월 17일에는 재단법인 기독교선교횃불재단 전 이사장 이형자 권사가 80세로 별세했다. 이 권사는 1977년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모임인 횃불회를 처음 시작했고, 1979년 설립된 한국기독교선교원 초대 원장, 1989년 설립된 (재)기독교선교횃불재단 원장과 이사장,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설립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3월 30일에는 강병훈 목사(남산교회 원로)가 91세로 별세했다. 강 목사는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재단에서 초창기 때부터 사무총장을, 이후 상임이사와 부이사장 등을, 지난 2009년부터는 이사장을 맡아 왔다. 이 외에도 이화학원 이사장, 한경직 목사 기념사업체인 추양선교재단 이사장 등을 지냈다.
4월 1일에는 평생 학원 복음화에 헌신해 온 명지대학교교회 유병우 목사가 69세로 소천받았다. 그는 명지병원 원목실장, 관동대 기독교학 교수와 교목실장, 명지학원 선교실장, 명지대 교목 등으로 학원선교와 후학 양성에 힘섰다. 2002-2021년 명지대학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했다.
4월 16일에는 은평제일교회 이예경 목사가 68세로 별세했다. 그녀는 애니(ANI)선교회 대표로 활동하다 심하보 목사가 코로나19로 사경을 헤맬 때 은평제일교회 동사목사로 섬겼고, 지난해 8월 이 교회 담임에 취임했다. 별세 직전엔 건강 문제로 안식월을 보내던 중이었다.
5월 26일에는 정일권 박사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53세의 이른 나이에 하늘로 떠났다. 그는 동성애·소아성애 운동의 이론적 기원과 권위로 작용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비판한 서적 <프로이트의 황혼>을 탈고한 후 5월 8일 국회 세미나에서 강의할 예정이었으나, 전날 뇌출혈로 쓰러졌다.
정일권 박사는 독일 중심 동성애·소아성애 성혁명 운동의 악영향과 이를 옹호한 김누리 교수(중앙대),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이데올로기 등을 학문적으로 비판해 왔다. 특히 2005년 르네 지라르의 이론을 중심으로 동서양 사상을 문명 담론 차원에서 비교 연구했고, 지라르를 직접 2번이나 만나 학문적 대화를 나눴던, 국내 대표적 지라르 연구가였다.
6월 4일, 20세기 가장 주목받은 신학자 중 한 사람이었던 ‘희망의 신학자’ 독일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 교수가 98세로 별세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 독일군으로 참전했던 그는 1946년 포로수용소에서 성경을 읽고 신앙을 갖게 됐다.
무신론적 ‘희망의 철학’에 대한 신학적 응답 <희망의 신학(1964)>으로 신학적 지형도를 단숨에 바꾸며 세계적 명성을 얻었고, 칼 바르트 이후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현대 신학자로 인정받았다. 이후에도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1972)>,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1985)>, <오시는 하나님(1995)>, <희망의 윤리(2010)> 등 3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마지막 저서는 <나는 영생을 믿는다>.
6월 17일에는 대전 송촌장로교회 담임으로 오랜 기간 동안 정직운동에 앞장서 온 박경배 목사가 68세로 별세했다. 그는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예배 회복을 위한 자유시민연대’ 실행위원장으로서 예배 회복 운동에 앞장섰다.
다음 날인 6월 18일에는 국내외 선교와 복음통일을 위해 헌신한 한사랑선교회 대표 김한식 목사가 췌장암 합병증으로 폐렴 증세를 겪다 78세로 소천받았다. 김한식 대표는 1971년 한사랑선교회를 설립해 50년간 선교에 힘썼다. 그는 회개와 사랑 실천 운동, 미스바 성회 등을 진행하며 복음화를 위해 노력해 왔으며, 주한미군 철수 반대 서명운동, 구국순례대행진 등 나라사랑 운동을 주도했다.
7월 30일에는 동성애 성향을 극복하고 탈동성애 인권운동을 펼치던 홀리라이프 대표 이요나(본명 이희진) 목사가 하나님 품으로 돌아갔다. 그는 최근 폐암으로 투병 생활을 해 왔다.
1980년대 초반 이태원에서 한국 최초로 게이바를 열었다가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으나 동성애 성향을 떨치지 못해 괴로워하다, 일본에서 신학교에 다니던 43세 때 ‘악령을 쫓으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칠판 글씨를 보고 극적으로 동성애 탈출을 경험했다.
이후 이태원 인근 한남동에 ‘서울 갈보리채플’을 개척하고, 성경적 자기대면과 치유상담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갈 곳 없는 동성애자들과 탈동성애자들을 돌보면서 탈동성애 운동을 이끌었다. 매년 퀴어축제가 열리는 날 서울 종각 인근에서 ‘홀리 페스티벌’을 열었으며, 동성애 선천성 주장에 대한 ‘살아 있는 반박 사례’로 관심을 모았다.
석 달여 후인 10월 25일에는 ‘국민 엄니’ 배우 김수미 집사가 하늘로 떠났다. 김수미 집사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56년 동안 주님을 모르고 살다가, 한 설교를 듣고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됐다고 한다. 이후 다양한 기독교 방송사 프로그램과 집회 등에서 간증을 전해 왔다.
11월 27일에는 유명 부흥사이자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장을 지낸 박태희 목사(성락성결교회 원로)가 90세를 일기로 소천받았다.
1934년 서울에서 태어난 박태희 목사는 30대부터 부흥회를 다니기 시작해 전국 방방곡곡과 세계 곳곳을 다니며 부흥회를 인도했다. 강원 주문진교회를 거쳐 성락성결교회에 부임해 말씀·기도 운동에 주력하며 교회 부흥의 토대를 마련했다. 48회 총회장에 오른 박 목사는 총회장 시절 처음으로 교역자 연금 지급을 시작했고, 해외 유학생들과 농어촌교회 및 미자립교회 교역자 자녀 장학금 제도를 시행했다.
이 외에도 서울에서 제주까지,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땅에서의 사명을 마치고 부르심을 따라 먼저 하늘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