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록, 한 점의 그림] <울타리에 둘러싸인 일출의 들판>(1889)
창조신학적 면모 감지함 통해
창조주의 선하심 생각하게 해
고흐, 해 바라보며 인생과 역사
주관하시는 창조주 전능 묵상
환란 왔을 때 다른 이들과 달라
비추는 태양 통해 우리 붙드심
한때 부친을 따라 목회자가 되기를 원했던 반 고흐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병마가 찾아왔다. 이 때문에 그는 졸지에 사람들에게 기피 대상이 되어 버렸으며, 결국 자의 반 타의 반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반 고흐는 생 레미 근처 생폴 드 모졸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을 때 자주 신경발작을 일으켰고, 그러자 그는 증세를 버틸 수 있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았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깨닫고자 깊이 파고들다 보면 누구든 발작 증세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모두들 알게 될 거라고 믿어. 너와 나는 무엇이든 함께 할 수 있을 거야. 우리가 함께 한다면 적어도 두려움이나 공포 따위로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는 일 따위는 생기지 않을 거야(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1889. 5. 25).”
생폴 병원에 있을 때 반 고흐는 전통적인 기독교적 주제를 다룬 <피에타>, <선한 사마리아인>, <나사로의 부활>을 제작했다. 앞의 두 점은 들라크루아, 다른 한 점은 렘브란트의 그림을 각각 모사한 것이다. 종교적 주제를 다룬 작품과 다르게, 일상적 풍경 속에 그의 소망을 담은 작품도 엿볼 수 있다.
<울타리에 둘러싸인 일출의 들판>(1889)은 그의 창조신학적 면모를 감지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유화는 병원 주위 밀밭을 그린 것인데, 중경에 울타리가 보이고 그 뒤쪽으로는 저편의 산에서 솟아오르는 일출의 태양을 목격할 수 있다.
구도 상으로 보면 르네상스 이후 탄생한 고전적인 소실 원근법에다 알 수 없는 공간의 깊이를 자아내는 암시적 터널효과의 결합이 돋보이는 작품이다(Rainet Metzger, Ingo Walther, Van Gogh, Taschen, 1998, 203쪽).
초록색 들판에 산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는 평범한 시골 풍경으로 생각할지 모르나, 화면에서 제일 강조되고 있는 것은 일출 시 태양의 광경이다. 태양이 떠오르자, 빛 무리가 사방에 빠르게 퍼지며 지상을 비춘다.
“또 하나의 그림은 어린 밑밭의 아침을 표현한 것이야- 멀리 보이는 몇 개의 선, 밭고랑이 화면 위쪽을 달리고, 벽과 라일락 색 언덕으로 향하고 있어. 밭은 보라색과 황록색, 흰 태양은 노란색의 거대한 빛 무리에 둘러싸여 있어(테오에게 보낸 편지, 1889. 11. 22).”
이 유화는 같은 기간 제작한 <생폴 병원의 정원>과 비교된다. 병원 주변을 소재로 한 것인데, 화면 전면에 가지가 잘려나간 나무가 눈에 띈다.
편지에 따르면, 이 나무는 번개에 맞아 쓰러진 것을 정원사가 톱으로 베어낸 것이다. 그 나무는 산책길 옆에 핀 풍성한 장미꽃과 대조를 이룬다.
큰 부상을 입은 나무와 천진난만하게 피어난 장미꽃에서, 우리는 엇갈린 존재의 양상을 접하게 된다. 반 고흐 역시 투병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베인 나무를 보고 자신처럼 고통 받는 사람들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다시 <울타리에 둘러싸인 일출의 들판>으로 돌아오면, 이 작품은 빛의 조명 하에 놓인 세상을 연상시킨다. 필립 코닝크(Philip Konick)가 웅장한 창공 아래 사는 마을의 거주민을 통해 신의 은총을 암시한 것같이, 반 고흐의 <울타리에 둘러싸인 일출의 들판>은 지상의 모든 것을 비추며 사랑과 은혜를 베푸시는 창조주의 선하심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하늘을 물들이는 노랑색을 대지에 흩뿌려 놓은 것은 태양의 은총이 대지를 온통 적시고 있음을 나타낸다.
반 고흐가 요양원에서 ‘매우 아름다운 시’라고 표현한 휘트먼의 <콜럼버스의 기도>에 대해 이야기하였는데, 클리프 에드워즈(Cliff Edwards)는 말년에 이른 콜럼버스의 투쟁과 회의와 성취들을 기술한 이 시가 요양원에서 병마와 싸우는 고흐와 비슷하다고 했다.
시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갑자기 내 앞에 보이는 이것들은 무엇을 뜻하는가? / 마치 기적처럼, 어떤 거룩한 손길이 내 눈을 열어 놓았네 / 어슴푸레한 거대한 형체가 바람과 하늘 속에서 미소짓네(Cliff Eswards, The Shoes of Van Gogh, 최문희 역, 『하나님의 구두』, 솔 출판사, 2004, 110쪽)”.
반 고흐는 하늘을 내다보면서 휘트먼의 시처럼 무한함의 현존과 같은 낭만적 경험을 했을 것이다.
물론 다른 해석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네덜란드 미술가들에게 ‘하늘’은 창조주의 전능과 섭리와 관련이 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것을 양육하시며 다스리신다는 인식이 그들의 의식 저변에 깔려 있었다. 이와 같은 인식은 하늘을 창조주를 바라보는 계시요 메타포로서 기능하였다.
이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우리는 그의 그림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본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일생을 보심이여(시 33:13)”라는 통찰이 그의 예술 기저에 흐르고 있다. 하나님의 섭리적 다스림에는 자연의 질서뿐 아니라 그 분이 만드신 피조물 하나하나에 대한 돌보심도 포함된다.
태양의 이미지를 기용한 것을 두고 그가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태양을 숭배한다고 보는 시각도 있으나, 태양은 이전부터 기독교에 있어 중요한 상징이었다. 성경에서 해는 일반적으로 영원히 빛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데 비유되었다(『IVP 성경사전』, IVP, 1992, 541쪽). 오실 메시아를 ‘공의로운 해(말 4:2)’로 비유하기도 했다. 이 같은 기록은 그를 태양 숭배자로 몰아가는 것이 얼마나 얼토당토 않은 논리인지 알려준다.
태양에 대한 장 칼뱅의 기술은 여기에 신뢰성을 보탠다. “태양의 힘보다 더 놀랍고 더 빛나는 힘을 가진 피조물은 없다. 태양은 그 빛으로 온 지구를 비출 뿐만 아니라 그 열로 모든 생물을 기르며 소생시키니 이 얼마나 위대한가? 그 광선으로는 땅에 풍요함을 불어넣지 않은가(『기독교 강요』 Ⅰ, 16, 2)?”
고흐는 태양 자체를 세계의 근원 원인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것은 일종의 은유로 사용되었다. 은유는 특히 인간의 머리로는 쉽게 닿을 수 없는 사실을 이해할 때 요긴하다.
그 분은 초목과 식물의 씨앗을 따뜻하게 하고 싹과 줄기를 자라게 하고 따듯한 온기를 공급하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신다. 쉬임없이 공급되는 빛의 온기 덕분에 우리도 존재하는 것이다. 매일같이 태양이 출몰하는 것은 자연의 맹목적 본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부성적 은총(fatherly favor)’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기독교 강요』 Ⅰ, 16, 2).
생폴 병실에서 반 고흐의 삶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그는 낙담하거나 원망하는 대신, 태양을 바라보며 인생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창조주를 묵상하였다. 그분이 엉망진창이 된 인생을 선한 길로 이끌어주실 것임을….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과 다른 차이점은 환란에 처했을 때 뚜렷해진다. “사방에서 수많은 어려움에 휩싸여 있을 때, 유일한 해결책은 우리의 눈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다(John Calvin, Heart Aflame, P&P Publishing Company,1999, 42쪽).” 태양이 그리스도인들과 지상을 비춤을 통해 우리를 붙들고 계심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서성록 명예교수
안동대 미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