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IC 총회장 림택권 목사 (2)
“두 개의 평행선으로 이뤄진 기찻길이어야만 기차가 굴러갈 수 있듯, 우리네 인생도 형통함과 곤고함이라는 평행선 위를 달리는 기차와 같지 않을까 한다. 우리 앞날은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그저 좋은 날에는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곤고한 날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가 뭔지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 그것이 우리 인생 아닐까(전 7:14). 삶에서 항상 하나님은 모든 걸 미리 준비하고 계셨다는 걸 느낀다. 그래서 내 신앙의 신조도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뜻하는 ‘여호와 이레’다.”
올해 한국 나이로 92세인 림택권 목사는 2008년 2월 종교개혁 원리를 사상으로 삼는 ‘성경적성경연구원(Sloa Scriptura Institute)’을 설립했다. 총장을 지낸 아신대 동창 모임에서 정기적으로 모여 성경을 연구하며 기도하자는 의견 끝에 발족했다고 한다.
코로나 전까지는 매주 목요일 서울 압구정예수교회(담임 임우성 목사)에 모여 전국에서 몰려드는 제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성경을 강의했다. 김해에서 매주 KTX를 타고 참석한 목회자도 있었고, 필라델피아에서의 친분으로 전북 진안에서부터 공부하러 오는 목회자도 있을 정도로 호응이 높았다고 한다. 림 목사의 여러 답변들이 모두 성경으로 귀결되는 데는 이러한 배경이 있다. 전편에 이은 림택권 목사의 이야기.
기도 내용, 하나님 중심 돼야
감사의 조건 한두 가지 아니야
삶의 원천, 우리에서 주님으로
-전편에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 우리의 기도가 바뀌어야 하는군요.
“내 자녀가 공부를 잘해서 일류대학에 갔다면, 대개 ‘하나님 일류대학 가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공부 잘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그것도 물론 기도이지만, 다르게 생각해 봅시다.
자녀가 열심히 공부해서 일류대학에 간 건 사실이겠죠. 그리고 부모가 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은 만들어줄 수도 있겠죠. 그런데 시험 치러 가는 날 자동차 사고가 나지 않았기에, 제 시간에 시험장에 들어가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죠.
그리고 부모가 아무리 공부할 환경과 조건을 만들어준다 해도, 자녀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겠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야겠다’는 소원을 주신 분이 누구일까요? 하나님이 주셔야 가능한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머리 좋은 자녀가 열심히 공부해서 일류대학에 합격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 감사합니다. 시험 날에 교통사고가 나지 않아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고, 시험 문제도 자녀가 공부한 부분 가운데 나오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해야겠죠. 감사할 조건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입니다.
결국 우리 삶의 원천은 ‘먼저’는 우리가 아닙니다. 제가 나이에 비해 건강을 유지하는 이유는 예전 하루에 1만 보 이상 걸었기 때문이라고 봐요.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걷고자 하는 마음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해야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단초가 될 것입니다.”
오네시모 위해 빌레몬에게 편지
대신 값 치르는 것, 바로 십자가
누군가의 고통 대신 갚아주는 것
-전편의 로마서 말씀 외에 또 기억할 말씀이 있다면.
“제가 출석하는 서울 한 교회에서 최근 설교를 부탁했어요. 제가 택한 본문이 빌레몬서입니다. 내용이 한 장뿐이죠(웃음). 빌레몬은 부자였는데, 바울이 전도해서 교인이 됐어요. 빌레몬이 부잣집이니 종들이 많았겠죠. 그런데 오네시모라는 종, 노예가 주인인 빌레몬의 돈을 훔쳐서 도망을 갔어요.
당시 노예란 주인의 소유물이었잖아요.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고, 그의 생명도 죽일 수 있었어요. 노예가 도둑질하다 잡히면 사형이 가능했죠. 그 노예 오네시모가 도망을 쳤는데, 빌레몬이 살던 지금의 터키(튀르키예)에서 로마까지 간 모양이에요. 그런데 빌레몬서가 옥중서신이잖아요. 감옥에서 바울이 오네시모를 만난 것입니다. 오네시모가 로마에서도 어떤 못된 짓을 했을 수 있어요.
어쨌든 바울이 감옥에서 만난 오네시모를 전도해서, 완전히 교인이 됐어요. 그리고 지금 바울을 돕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해결하지 못한 게 있어요. 오네시모의 주인이었던 빌레몬도 바울이 과거 전도해서 아마 장로가 됐을 거예요. 그런데 바울이 오네시모를 계속 데리고 있으려니, 둘 사이를 화해시키지 않고서는 양심상 괴로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쓴 편지가 빌레몬서입니다.
아직 빌레몬과 오네시모는 주인과 노예 사이잖아요. 그러니 바울이 편지에서 빌레몬에게 ‘귀한 것을 하나 발견했다’고 해요. 당신 밑에 있던 노예 오네시모가 비록 돈을 훔쳐 도망갔지만, 그로 인해 오네시모가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문제를 해결할 기회를 얻었다는 것이죠. 그러니 용서해 달라고요.
그리고 바울이 오네시모와 같이 사역을 하고 싶은데, 빌레몬 당신이 허락해 줘야 기쁜 마음으로 같이 일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오네시모가 훔친 돈은 자신이 대신 값을 치르겠다고 해요. 이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 죗값을 대신 지고 가신 십자가의 샘플이죠.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는데, 단지 고생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의 고통을 내가 어떤 모양으로든 갚아주는 것을 뜻합니다.”
주에게서 나오고, 시작하신 분
주로 말미암고, 섭리의 하나님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결론까지
‘믿습니다’에서 ‘믿음 없음을…’
-새겨 듣겠습니다.
“아까 로마서 11장에서 ‘먼저’라는 단어를 언급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먼저’ 바쳐서 하나님께서 되갚아주셨다고 생각해선 안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보다 밑에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죠.
그 다음 절을 보셔야 합니다. 로마서 11장 36절에서는 성경 전체를 조망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만물, 곧 우주가 하나님에게서 나왔어요. 모든 것을 시작하신 분이자 창조주이시라는 의미죠.
둘째로 ‘주로 말미암고’라는 것은 원인을 뜻하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지금 이 우주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섭리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창조주이면서, 섭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세상에 보내실 뿐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셋째로 ‘주에게로 돌아감이라’고 했습니다. 시작도 원인도 하나님이시고, 결론도 하나님이십니다. 전치사가 중요해요. ‘에게서(from)’, ‘말미암아(through)’, 그 다음 ‘에게로(to)’입니다. 성경 전체에 흐르는 내용입니다.
창조하신 것은 우리가 그때 살지 않아서 모를 수 있죠. 그리고 앞으로 예수님이 다시 오시거나 모든 결론은 하나님이 내리신다고 하지만, 아직 미래 일이라 모를 수 있어요. 그런데 이 두 가지는 우리가 대개 믿어요.
오히려 신앙생활에서 가장 믿기 힘든 것이 ‘섭리의 하나님’이에요. 주님께서 다스리신다는 말씀 말입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세상에 악이 왜 이렇게 흥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죠. 선하신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에서, 왜 이렇게 주사파가 힘이 셀까요?
그래서 과거 영국 사람들이 학설을 내놨어요.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자동차를 다 만드셨지만, 관리는 안 하신다는 거죠. 손을 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휴가 가셨다고 하면, 하나님의 책임은 없어지니까요. 그 학설이 ‘이신론(理神論·Deism)’입니다. 이 학설을 좋은 의미에서 믿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지만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긴 상태에서, 과연 신앙생활이 가능할까요? 반면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5장 17절에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손을 떼신 게 아니죠. 여하튼, 우리 성도님들께서 창조와 종말을 넘어, 섭리의 하나님까지 정말 믿으시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마가복음 9장을 보십시오. 귀신 들린 아들을 고쳐달라고 찾아온 아버지에게 예수님께서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버지가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라고 했어요. 이게 무슨 뜻인가 깨닫느라 시간이 많이 갔어요.
‘믿나이다’ 해놓고, ‘믿음 없는 것을 도와 달라’니요. 이런 말씀들을 자꾸 깊이 생각하는 게 신학이고, 영적으로 성장해 가는 길입니다. 묵상한다고도 하죠. 소가 되새김질하는 것과 같아요.
이 말씀은 믿음이란 내가 주관하는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계속 부어 달라는 뜻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믿습니다’ 했으면 끝인데, ‘믿음 없음을 도와 주소서’라니요. 당장 주님을 위해 죽을 것 같다가도, 다음날 또 주님이 계신가 안 계신가 하는 ‘변덕 투성이’인 것이 바로 우리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쓸 만한 말을 했는지 모르겠네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