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나영 칼럼] 우울하고 불안한 당신에게
개혁주의 기독교예술학 전문가인 서나영 박사님의 ‘예술로 진리 보기’ 시리즈입니다. -편집자 주
충분한 기쁨 못 누리는 이들 많아
존 파이퍼, 기독교 쾌락주의 주창
왜 우울한 채 지내면 안 되는가
1. 선물 같은 이 땅의 삶 누려야
2. 복음 대변할 수 없기 때문
3. 하나님과 친밀해질 수 없기 때문

삶은 우리에게 벅찬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가장 큰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소요리문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울하고 절망에 빠져 있다 해서, 절제할 수 없는 분노와 슬픔 중에 거한다 해서, 길고 긴 낙심 속에 마음에 그늘이 졌다 해서,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은 아니다. 더 정확히는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기쁜 삶을 사는 이들보다, 주님 안에서 충분히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더 많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며 그의 남은 고난을 채워가는(골 1:24) 그리스도인이 심각하게 사는 것은 당연한 것일까? 우리는 매일매일 유쾌하고 즐거우면 안 되는 것일까? 태어나서 걷고 뛰는 순간부터 엉덩이를 흔들고 시시때때로 춤을 추는 행복한 딸에게, 그리스도인으로의 삶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 것일까? 유난히 침체된 겨울, 온 나라와 민족이 불안한 오늘, 유독 아팠던 독감을 앓으며 고민했다.
크리스천 헤도니즘(Christian Hedonism: 기독교 쾌락주의/희락주의)이라는 용어는 미국의 저명 설교가이자 신학자인 존 파이퍼(John Piper)가 처음 사용했다. 쾌락이라는 단어에 심히 불편함을 느끼는 개신교 전통에 맞서, 그는 설교와 그의 저서를 통해 “기독교 희락주의는 우리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최고의 행복(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선포했다. 최고의 행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가장 즐겁고 만족스러운 상태이며, 이 상태에 있는 우리를 통해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가장 영화롭게 된다는 것이다.
행복하려면 불안과 우울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파이퍼의 기독교 희락주의는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의 저서 <영적 침체(Spiritual Depression)>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 책은 로이드 존스의 설교 21편을 묶은 책으로, ‘영적 침체’라고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상태의 원인을 진단하고 치료 방법을 제시한다. 이 책이 특별한 것은 개인의 기질과 뇌파와 몸의 상태와의 관련성 외에, 영적 세계의 문제를 파고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가장 강력한 설득력은 ‘그리스도인이 왜 행복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설명에서 나온다. 다시 말하면 무기력하게 살아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이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왜 그리스도인이 우울한 채로 지내면 안 되는가?에 대한 답인 것이다.
로이드 존스가 드문드문 언급한 이유들을 모아 정리해 보자면, 첫 번째는 선물 같은 이 땅의 삶을 맛보지 못한 채 주님의 옷자락 끝에 머리를 붙들고 겨우 구원을 받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삶 속에 우울함이 지속될 때 놓치는 것은 단순한 가치가 아니라 삶 자체다. 셰익스피어의 표현처럼 평생 깊은 물에는 한 번도 나가보지 못하고, 얕은 물에 갇혀 불행하고 비참한 삶을 사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우울이 지속된 상태에서는 복음을 대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침체된 마음은 반드시 얼굴에 드러난다. 내내 침체돼 보이거나 불행한 표정으로 사는데, 누구의 눈에서 구원의 소망이 보일 수 있겠는가? 복음은 인류에게 가장 기쁜 소식인데, 불안하고 낙담한 상태로는 그가 가진 소망의 근원을 물어올 자(벧전 3:15)가 없다.
세 번째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불안하고 불행하며 비참하게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근원적인 이유는 불신앙이다. 이는 결국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이다.
복음의 신비와 비밀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부분만을 받아들이거나 크신 하나님을 축소하는 것이며, 이것은 치명적인 실수이다. 믿음이 무엇인지 인지하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낙심은 크신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없게 하며, 우리가 싸워야 하는 선한 싸움에서 계속 이길 수 없게 한다.
침체 끝내고, 기쁘기를 투쟁해야
그리스도인 즐거운 삶, 역설 포용
목숨 걸고 고군분투 행복의 습관
‘찬송’, 총체적 기독교 신앙 다뤄
침체 거부하는 이들 부르는 노래
우리는 온 힘을 다해 즐거워야 한다. 파이퍼는 로이드 존스의 책을 기반으로 ‘영적 침체(Spiritual Depression, 시편 42편)’라는 주제로 설교할 때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연적으로 닥치는 우울함, 즉 절망적 환경과 그에 따른 무기력한 감정에 머물 때 시편 기자가 취했던 태도와 자세에 주목했다. 다윗의 비참한 환경과 마음의 고백,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소망을 바라보고자 하는 처절한 싸움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는 침체를 끝내야 한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소망으로 기쁘기를 끊임없이 투쟁해야 한다. 우리의 죄에 대한 진실을 인식하는 싸움, 죄의 흔적과 과거에 갇히지 않으려는 싸움, 자신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심판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연습, 미래의 불안을 맡기는 연습, 어려움과 인생의 풍랑 속에서 자신을 말씀 앞에 장악하는 연습, 시간을 들여 기도와 말씀 가운데 주님과 친밀함을 갈망하는 태도, 하나님 아버지의 징계와 연단 속에 자녀로의 자세를 배우는 투쟁 말이다.
그리스도인의 즐거운 삶은 역설을 포용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의 생명이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약 4:14)와 같다고 하지만, 동시에 천하보다 귀하다(막 8:36-37)고 말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기뻐하라(빌 4:4)고 가르치지만, 동시에 애통하라(마 5:4)고 한다. 우리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지만(막 8:34), 그 길이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길이다(히 13:21).
그렇다면 온 힘을 다해 즐거움을 추구하는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오랜 무기력과 불안과 우울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목숨을 걸고 고군분투했던 행복의 습관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것은 찬송이다. 오늘의 찬송가는 전통적 예배 시간에 한두 곡 불리는 장년 세대의 기독교 문화유산처럼 남아 있다. 찬송가학의 광대한 지식과 그 안의 빛나는 가치를 여기서 다 풀어 놓을 수는 없지만, 음절과 운율이 규칙적이고 가사의 내용이 총체적 기독교 신앙을 다루고 있는 유일한 문헌은 찬송가다.
무엇보다 찬송가의 대부분 곡들은 고난 중에 즐거움을 택한 자들의 시들로 이뤄져 있다. 침체됐지만 그것을 거부하는 자들의 노래다. 때문에 찬송가는 단순한 위로의 찬양이 아니다. 강한 말로 나의 행동을 교정하고, 훈계하며, 신학의 스펙트럼을 전체적으로 커버하며 교육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마음껏 찬양할 수 있는 곡들이 들어 있다.
단 한마디도 기도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찬송가를 부르다 보면 녹는다. 찢겨서 더 이상 소생하지 못할 것 같은 마음도 찬송 속에 아물고, 홀로 깊은 구덩이 빠져 다시는 나가지 못할 것 같은 마음에도 찬송은 생명줄이었다. 그것은 기쁨을 넘어 생명력의 경험이었다.
홀로 독대 중 기도와 찬송, 치트키
믿음, 우울하기를 거부하는 것
몸 너무 피곤하다면 빠른 찬송을
너무 침울하면 깊은 묵상 찬송을
오늘도 체념한 상태로 있지 않길
고독 속에 홀로 하나님과 독대하는 기도 시간에 부르는 무반주 찬송은 여전히 나의 불안과 침체된 마음을 구하는 ‘하나님의 치트키’다.
결국 행복의 다른 말은 생명력이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의 수많은 곡을 쓴 존 웨슬리는 그의 책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The Life of God in the Soul of Man)>에서 파이퍼가 말한 ‘크리스천 헤도니즘’의 비밀을 앞서 말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력과 에너지, 그 사랑의 역동성과 능력이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답게 한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 그를 즐거워하고 찬양할 때, 우리는 가장 행복하고 진짜 살아가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된다.
믿음은 우울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내 마음을 내가 컨트롤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길 바란다. 나의 경우, 익숙하고 편안한 습관들 안에서 좋은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찬송가가 올드(old)하고 어렵고 낯설게 느껴진다면, 여러 방법으로 시도해 보길 바란다.
내가 듣기에 좋은 선율의 찬송을 찾아 불러보고, 지금 마음 상태에 부르고 싶은 가사가 담긴 찬송을 찾아보는 것도 좋다. 몸이 너무 피곤하다면 빠르고 힘찬 찬송을, 아무 생각이 안 날 정도로 침울하다면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는 찬송을 불러보기 바란다.
당신이 오늘도 체념한 상태로 있지 않길 바라며, Soli Deo gloria!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여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편 42:5)”.
서나영 박사
미국 남침례신학교(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교회음악(MM), 신학(M.Div.equi.), 기독교 예술학(Ph.D)을 공부했다. 한국성서대, 백석대, 총신대에서 강의했으며, 현재는 미국 스펄전 칼리지 초빙교수로 재직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