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영 칼럼 4] 불교의 인간관, 죽음관
Ⅵ. 불교의 인간관, 죽음관
1. 생명의 형성
불교가 출현하게 된 계기는 교조(敎祖) 석가모니의 “인생은 괴롭다(苦)”라는 현실 인식에서부터 비롯된다. 즉 불교는 사람은 죽게 된다는 괴로움과, ‘어떻게 이런 고통으로부터 탈출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따라서 원시불교는 순전한 인생 철학인 것이다. 불교의 모든 경전과 제반 주장 및 학설은 이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명 형성의 요소
(1) 5온설(五蘊說):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살아 있는 생물은 5온, 곧 색온(色蘊)·수온(受蘊)·상온(想蘊)·행온(行蘊)·식온(識薀)이 모여 생명이 발생하고, 5온이 흩어지면 소멸한다는 설이다. 즉 모든 존재는 5개의 구성요소로 구성된다. ‘온(蘊)’이란 쌓아 모인다는 뜻으로 ‘음(陰)’이라고도 한다.
(2) 연기설(緣起說): 석가모니는 사물도 연기(緣起)법에 따라 발생한다고 한다.
-생명체의 형성 과정
불교에서는 생명 탄생의 첫 단계인 수태(受胎)에 관해서 부(父)와 모(母), 그리고 식(識), 이 세 가지 인연(因緣)이 화합하여야 수태할 수 있다고 한다(三事和合: 3사화합).
※식(識)이 어디에 있다가 와서 어떻게 화합하는지 설명이 없다.
(3) 마음(心)이 곧 조물주(造物主): 5온은 마음(心])서 생긴다’고 <화엄경>에서 설하고 있다. 앞장에서 마음이 만물(萬物)을 형성한다고 했는데, 이 마음은 또 생명을 탄생시킨다고 한다.
2. 불교의 영혼관(靈魂觀)
-영혼(靈魂) 또는 자아(自我)의 문제
영혼 또는 자아의 문제는 일찍부터 논의되어 왔으나 석가모니는 자아나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무아론(無我論): 석가모니는 자아나 영혼의 존재를 부인한다. 그는 ‘무아(無我)’를 주장했는데, ‘아(我)’란 주재(主宰), 실체(實體)의 의미를 가지므로, 무아는 곧 무주재(無主宰), 무실체(無實體), 무영혼(無靈魂) 등의 의미를 지닌다.
-영혼과 동일한 기능을 하는 사례
석가모니는 자아 또는 영혼의 존재를 부인했으나, 불경에는 영혼과 동일한 기능을 하는 것들이 여럿 있다.
(1) 마음(心)과 같은 기능을 하는 4무색온(四無色蘊, 수온(受蘊)·상온(想蘊)·행온(行蘊)·식온(識蘊), 4무색음四無色陰)
(2) 윤회의 주체인 업(業)
(3) 중유(中有)
(4) 세계의 모든 현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아뢰야식(阿賴耶識)
-결국 불교는 영혼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사실상 영혼의 기능을 하고 있는 4무색온, 업, 중유, 아뢰야식, 마음 등을 인정하고 있다.
3. 불교의 죽음관
-죽음의 현상
4유(四有) 개념에 따르면 5온이 모여 생명이 탄생하고(생유, 生有) 이 생명체가 일정 기간 동안 살다(본유, 本有) 죽음이 오는데, 이 죽음의 순간 곧 죽음의 찰나(刹那)가 사유(死有)이며, 다음 후생을 받기까지 중유(中有)기간 동안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유의 찰나에 5온이 흩어지게 된다.
(1) 5온의 분산: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살아 있는 생물은 5온이 모여 생명이 발생하고, 이 5온이 흩어지면 생명이 소멸한다는 5온설이 있는데, 원시불교에서의 윤회는 이 5온이 흩어져 죽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2) 4대(四大)의 분산: 우리(중생(衆生) 또는 유정(有情))의 몸(육신, 肉身)은 4대(지(地)·수(水)·화(火)·풍(風))로 이루어져 있으며, 목숨이 끝난 때에 이 4대는 각각 원래 상태로 돌아간다고 한다.
-중간(中間) 상태
중유(中有, 중음(中陰)): 중유란 생명체가 죽는 순간인 사유부터 다음 생을 받기까지의 기간 또는 그 기간 동안의 의식(意識)의 집합체(集合體)를 의미한다.
-윤회(輪廻)
윤회설은 불교의 고유한 사상이 아니라 우파니샤드의 윤회 사상을 발전시킨 것으로서, 현재의 생(현생, 現生)은 끝없는 전체 생[生, 전생(前生)·현생(現生)·내생(來生)] 가운데 하나의 생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윤회란 한 인간이 죽은 후에 그가 전생前生에 지은 행위(업, 業)에 따라 결정된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나는 것이다(재생, 再生). 윤회 주체(主體)는 불교가 영혼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업의 쌓임(온)이 주체이며, 윤회하는 모습은 ‘3계 5도(三界 五道)’를 돌고 돈다고 한다.
그렇다면 불교는 영원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B.C. 3세기경에 저작된 <나선비구경>에는 살아있는 동안 지은 선업 또는 악업의 결과로 죽은 후 전생(前生)의 존재가 아닌 전혀 새로운 존재로 3계(三界) 중 어느 한 곳에 다시 난다고 한다(재생). 즉 윤회에서 죽은 자는 다시 태어난 자와 동일한 존재가 아니라고 한다.
-윤회하는 주체
(1) 원시불교에서의 윤회하는 주체: 윤회의 주체는 윤회하는 과정에 있는, 한 생물의 의식주체(意識主體)를 말한다. 석가모니는 ‘연기설’과 ‘5온설’을 이야기하면서 윤회하는 인간의 의식을 ‘식’과 ‘4온’ 개념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이러한 의식적 주체는 일시적 자아인 가아(假我)에 불과하고 진정한 자아(진아, 眞我)는 무아(無我)라고 보았다.
(2) 부파불교에서의 윤회하는 주체: 여러 부파들은 이름은 달리 하나 유아(有我)라고 볼 수 있는 십수 개 개념들을 사실상 인정하고 있다.
(3) 대승불교에서의 윤회하는 주체: 아뢰야식은 장식(藏識)으로 번역되며, 과거 경험이나 업이 보존되는 장소이다. 이것은 마음의 무의식 영역(잠재심, 潛在心)을 가리킨다.
-윤회의 모습
윤회하는 장소: 애당초 원시불교에서 윤회하는 장소는 5도[五道: 천상(天上)·사람(人)·아귀(餓鬼)·축생(畜生)·지옥(地獄)]뿐이었다. 그러나 부파불교 시대에 와서 이 장소가 대폭 늘어나 3계(三界: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와 6도(六道: 5도에 아수라(阿修羅) 포함)를 윤회한다고 한다.
※그러나 3계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며, 불교인이 수행 발전 단계상 필요하여 분류해 놓은 상상의 세계일 뿐이다.
그런데 후대 대승불교 정토종에서 창작 내지 모방한 불국세계(佛國世界)와 중국 천태종(天台宗)의 3천세간(三千世間)과 화엄종(華嚴宗)의 화엄세계(華嚴世界) 또는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가 윤회하는 장소인지 열반의 장소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죽음 이후의 최후 상태
(1) 열반(涅槃): 열반이란 범어(梵語) ‘nirvana’의 음역(音譯)으로, ‘번뇌의 불을 끈 상태’를 말한다. 무한한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탈출해 더 이상 다른 생명체로 태어나지 않는 최후의 상태가 곧 열반인 것이다.
열반은 해탈(解脫)과 같은 뜻으로 풀이되기도 하나, 어떤 경우 해탈로부터 열반이 얻어진다고 생각된다.
가. 원시불교의 열반관: 전통적으로 원시불교에서는 열반 이후 존재에 대해 확실한 대답을 주지 않고 있다. 그것은 석가모니 자신이 이러한 물음에 대해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는 ‘모든 괴로움의 소멸’이라거나 ‘온갖 번뇌의 소멸’과 같은 표현만을 하였을 뿐, 열반 이후에 주체가 남아 있는지 아닌지에 관해 아무런 언명도 하지 않았다. 원시불교 경전에 나타나 있는 열반 상태는 ‘소멸(消滅) 내지 허무(虛無) 상태의 열반’과 ‘실재(實在)하는 열반’의 두 가지 개념으로 나뉜다.
나. 부파불교의 열반관: 부파불교에서 열반은 윤회하는 세계인 3계 즉 욕계·색계·무색계의 밖에 위치한다(장소적 의미). 열반은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는 세계로, 상주(常住)하지만 내용이 전혀 없는 허무의 세계다. 따라서 열반에 들 때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다. 대승불교의 열반관: 대승불교는 소승의 이러한 열반관을 비판하여 회신멸지(灰身滅智)의 열반이라 했다. ‘회신멸지’란 몸을 재(灰, 회)가 되게 하고, 마음(지혜)을 없앤다는 뜻으로 심신 모두 완전히 무(無)로 돌아가고, 번뇌를 없앤 경지를 말한다. 그래서 소승의 무위(無爲)·열반(涅槃)을 대승불교는 유위(有爲) 속에서 보는 입장을 내세운 것이다. 현실 사회속에서 이타(利他)의 적극적 실천(보살행, 菩薩行)을 강조하는 대승불교에서는 소승의 열반관을 일종의 허무주의라고 비판한다. 따라서 대승불교는 열반을 절대적 실재(實在)로 보는 입장이다.
(2) 열반과 불국세계의 이론적 모순: 열반설에는 해설이 불충분하고, 이론적 모순도 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원시불교 내부에서도 열반의 개념이 서로 다르다. 곧 소멸 상태의 열반과 실재 상태의 열반이라는 두 가지 대립되는 개념이 존재한다.
또한 석가모니는 열반을 묻는 사람에게 먼저 청정하고 슬기로운 눈을 가져야 열반을 알게 될 것이라며 결정적인 답을 피하고 있다. ①열반의 존재방식이 모호하다 ②열반에 들어가는 방법(方法)과 누가 열반에 드는지 모호하다 ③열반에 드는 시기를 알 수 없다 ④열반과 불국토는 어떻게 다른지 분명하지 않다 ⑤열반과 아라한(阿羅漢)의 관계가 모호하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열반에 이르는 데 있다. 어쨌든 열반은 출가(出家) 수행자에게 도달하는 마지막 최고의 경지인데, 열반의 개념조차 각 종파의 해석이 다르다. 그렇다면 어느 해석을 따라야 하는지, 그런 해석이 맞는지 알 수 없다. 결국 불교도들이 믿는 불교의 마지막 최고 경지인 열반은 어느 것을 믿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믿고 있다는 우스꽝스런 결론에 도달한다.
Ⅶ. 불교의 구제관, 종말관
1. 불교의 구제관(救濟觀)
불교에서는 구원(救援)이라는 말은 쓰지 않고, 구제(救濟)란 말을 사용한다. 그것도 원시불교나 부파불교에서는 사용하지 않았고, 대승불교에 와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승불교 정토종에서는 기독교의 구원을 모방하여 아예 아미타불(阿彌陀佛)이 구원을 해준다고 한다.
구제는 구원과 뜻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구제는 불행이나 재해를 만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을 말하는데, 대승불교에서는 한걸음 나아가 고통받는 사람들을 제도(濟度)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제도’란 미혹(迷惑)한 중생(衆生)을 인도해 깨달음의 경지로 구(求)해내는 것을 말한다. 제(濟)는 구제, 도(度)는 도달함을 뜻하는 것으로,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의 고해(苦海))로부터 구하여 피안(彼岸,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중생을 구하여 극락세계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결국 불교에서의 구제란 깨달음의 경지로 구해내는 것, 피안으로 건너가는 것, 극락세계(極樂世界)로 인도하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여기서 구해 내고, 건너가게 하고, 인도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또 그 주체가 그럴 능력이 있는가? 그것이 문제다.
원시불교에서는 구제라는 말 자체가 없으므로, 당연히 주체가 없다. 그러나 대승불교 정토종에서는 아미타불 부처를 신격화해 그가 중생을 구제한다고 한다.
구원이란 말은 기독교에서 주로 사용하는데, 죄(罪)로 인해 죽을 처지에 있는 인류를 구(求)해내 천국(天國)으로 인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다 보니 은연 중에 불교의 구제(救濟)란 말이 기독교의 구원(救援)과 그 의미가 같게 되었는데, 이는 대승불교 정토종이 기독교 교리를 상당수 모방하여 아미타불이 하나님 행세를 하기 때문이다.
(1) 원시불교의 구제관
석가모니는 구세주(救世主)라는 예언적이고 중개적인 개념을 부인했다. 불교에서의 구원은 인간 스스로의 의지적이고 지적(知的)인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다(자력구제, 自力救濟). 따라서 신(神)과 인간 사이 관계라는 기존 종교관을 무너뜨리고, 대신 인간 스스로 구원의 주체가 된다는 자의성(自依性)을 주장하게 된다.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네 자신을 등불로 삼으라고 석가모니는 말하고 있다.
(2) 부파불교의 구제관
부파불교에서는 불타가 설(說)한 ‘법’을 실천함으로써 해탈에 이른다. 이 외에 구제되는 길은 설해지고 있지 않다.
(3) 대승불교의 구제관
재가자는 불타의 가르침대로 법을 실천하기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불타의 대자비(大慈悲)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즉 출가불교가 ‘법 중심’ 불교인 것에 비해, 재가불교는 ‘불(佛) 중심’ 불교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재가자의 종교적 요구에 따라 불타의 구제를 설하는 가르침이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된다.
(4) 정토종의 아미타불 신앙
대승불교 정토종에서는 아미타불을 의지하면 구제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즉 자력구제가 아닌 타력(他力)구제인 셈이며, 이는 석가모니 사상과 정면 배치되는 것이다. 이 사상은 보살사상에 근거한다고 보이는데, 대승의 보살사상이란 일체의 생령(生靈)을 구하려는 자비이타(慈悲利他)의 정신을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견해는 석가모니 원시불교나 부파불교의 입장과 사상적 입장을 완전히 달리하는 것이다.
2. 불교의 종말관(終末觀)
불교에는 세상의 종말이란 개념은 없다. 석가모니는 세간이 영원한지 아니한지 명확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 일반적으로 불교는 세상의 종말이 없다고 한다. 즉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무시무종, 無始無終)고 한다. 다만 성(成)·주(住)·괴(壞)·공(空) 설(說)에 의하면 일시적인 종말 곧 괴(壞)의 단계는 있는데, 기독교의 종말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중국 천태종의 말법사상(末法思想): 중국 천태종의 말법사상은 정법(正法) 500년, 상법(像法) 1,000년, 말법 10,000년의 3시설(三時說)을 주장한다. 여기서 말법(정법의 절멸)이란 탁(濁)한 세상을 말하며, 석가모니 입적(入寂) 후 최초 1천 년(또는 500년)을 정법, 다음 1천 년을 상법, 그 후 1만 년을 말법이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상은 불법(佛法)의 존속기간을 말한 것으로, 세상의 종말에 관한 사상과는 논점이 다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세상의 종말이 없는 셈이다.
김중영 목사
온누리선교회 대표
불교권 선교 전문기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