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록, 한 점의 그림] 알브레히트 뒤러 <네 명의 사도>
뒤러, 교회 도덕적 타락과 교황
권력 남용 초대교회 순수성 회복,
교회 개혁 등 루터 한결같은 지지
그의 교회 갱신 사상 작품으로
가톨릭 정신 담은 라파엘로 작품
<시스티나의 성모>와 비교도

곤고하고 불안한 시대를 순전한 기독교 신앙으로 회복하고자 했던 종교개혁은 화가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에게 신앙의 재무장과 아울러 도전의식을 안겨 줬다.
뒤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의 고귀함과 그리스도의 은혜로 가득 찬 삶에 관심을 기울였던 뉘른베르크 기독교 인문주의자들과 함께 신앙갱신 운동에 동참했고, 예술 작품에 자신의 신념을 실었다.
<네 명의 사도>(1526)는 이런 신앙 갱신 운동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왼쪽에 있는 인물은 사도 요한과 베드로, 오른쪽에 있는 사도 바울과 사도 마가다.
두 패널의 앞쪽 두 명(요한과 바울)이 비중 있게 다뤄진 반면, 다른 두 명(베드로와 마가)은 덜 비중 있게 묘사되었다. 복음의 중요성을 분명하게 드러낸 요한과 바울 두 사도를 강조하려는 의도를 읽어볼 수 있다.
요한은 예수님의 보혈을 상징하는 주홍색 망토를, 다른 패널 쪽에 위치한 바울은 순결한 믿음을 강조하기 위해 흰색 망토를 걸치고 있다.
요한과 바울이 성경을 읽거나 들고 있는 데 비해, 베드로와 마가는 뒷전에 물러나 있도록 배치하였다. 각각의 패널은 두 명의 인물을 대칭적으로 배열함으로써 상호 조화를 돕고 있다. 화면 하단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적혀 있다.
“이 위태로운 시대에 세상의 모든 통치자들은 하나님 말씀을 잘못된 길로 이끌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에 아무 것도 더하거나 빼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뛰어난 네 사람, 베드로, 요한, 바울, 그리고 마가의 경고를 경청하라.”
이 같은 경고를 기록한 것은 당시의 정치적·종교적 배경과 거짓 교리를 촉진한 종교적 타락을 고려하면 납득할 수 있다. 뒤러는 이 글을 읽은 사람들에게 루터교 운동에 대한 지지와 영향력 있는 시민의 공유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전하고자 했다.
루터의 의견을 좇아 요한과 바울이 뒤러의 그림에서 중요하게 조명이 된 데 비해, 베드로와 마가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조명되었다. 종교개혁 때 교황의 권위에 대한 논쟁에 비추어, 베드로를 요한 뒤에 배치한 것은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섬기는 로마 교황청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루드비히 그로트(Ludwig Grote)는 이 그림에 대해 “로마의 첫 교황이자 초대교회 반석인 성 베드로를 보여줌으로써, 그리고 복음서를 읽는 성 요한을 보여줌으로써 뒤러는 교회에 있어 오직 유일한 권위는 교부도 아니며, 교황도 아니며, 교회의 회의도 아닌, 하나님 말씀임을 루터식 언어로 명쾌히 밝혔다(Carl C. Christensen, "Dürer's 'Four Apostles' and the Dedication as a Form of Renaissance Art Patronage", Renaissance Quarterly, 20 (3),1967, pp. 325–334)”고 주장했다.
뒤러의 그림은 종교개혁의 또 다른 핵심을 알려준다. 네 명 중 세 명, 즉 요한과 베드로, 바울은 성경을 읽거나 들고 있다. 요한은 하나님 말씀의 영원성을 선포하는 요한복음 첫 장을 펼치고 있는데, 이 말씀은 종교개혁가들로 하여금 종교적 변혁을 이루어내는 근거를 마련했다.
그리고 오른손에 복음서의 일부로 보이는 두루마리를 움켜쥔 마가(그의 얼굴은 뒤러가 베니스에서 본 만테냐(Mantegna)의 <마가>와 닮아있다), 이와 함께 왼손으로 성경을 받쳐들고 있는 바울을 통해 뒤러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의 권위’를 강조했다. 가톨릭 교리나 전설에 의존하기보다 하나님의 언약이 계시된 성경 본위의 종교개혁의 성격을 가감 없이 전달한다.

이 작품은 르네상스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라파엘로의 <시스티나의 성모>(1512)와 비교된다. 뒤러의 작품이 ‘네 사도’를 위주로 했다면, 라파엘로의 작품은 ‘마리아’를 중심으로 삼았다. 즉 삼각형 구도 정점에 마리아를 놓은 <시스티나의 성모>는 좌우에 식스토스 2세(St. Sixtus)와 바르바라(St. Barbara)를 보조인물로 각각 배치했다.
화면 우측에 무릎을 꿇은 교황 식스토스 2세는 그림 주제와 직접 관련이 없음에도 등장인물로 기용됐다. 우측 여인은 바르바라인데, 아버지의 거듭된 배교 회유에도 뜻을 굽히지 않자 부친에 의해 순교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화면 하단에는 교황 가문의 문장(紋章)인 도토리 모양 티아라(tiara)가 보이고, 푸티(putti)가 난간에서 정면을 주시하고 있다.
이 작품은 예수 탄생에 초점을 맞춘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마리아 사상(Mariology)’이 핵심 내용이며, 신자들이 그림 앞에서 성호를 긋고 고개를 숙였을 것을 상상하면 단순한 그림 이상의 역할을 했으리라고 추정된다.
마리아 배후에 그려진 일군의 그룹(Cherubim)은 예수님을 경배하는 것인지 마리아를 경배하는 것인지 불분명하지만, 보기에 따라 마리아를 찬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중세 시대에 그려진 성모 마리아 이미지가 ‘마리아 사상’에 따라 신성을 강조하였듯, 이 그림도 그런 위험성을 안고 있다는 뜻이다.
두 작품을 보면서 우리는 같은 기독교 회화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뒤러 작품이 자발적으로 제작한 것인 데 반해, 라파엘로의 작품은 이탈리아 북부도시 피아첸차(Piacenza)가 교황령(papal state)에 귀속된 것을 기념해 식스투스의 조카이던 율리우스 2세가 주문한 것이다.
산 시스토(San Sisto) 수도원 건립자가 교황 율리우스 2세였으므로 라파엘로는 당연히 교황 입김을 받았고, 식스투스와 그의 가문 문장까지 넣게 된 이유를 알 수 있다. 기독교 회화로 포장되었지만, 실상 특정 가문의 힘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당시 사회 전반이 얼마나 종교 권력에 휘둘렸는지 짐작케 해준다.
이에 반해 <네 명의 사도>는 자발적으로 제작해, 의뢰자의 입김을 전혀 받을 필요가 없었다. 순전히 뒤러 자신의 양심과 신앙에 입각해 성경의 권위와 복음의 가치를 강조한, 종교개혁 시대의 상징적 작품이다.
작품을 완성한 후에는 뉘른베르크 시에 작품을 기증했는데, 칼 크리스텐슨은 “종교개혁이 지역사회에 질서 있고 건설적인 방식으로 도입된 기념물(John Dillenberger, Images and Relics, Oxford University, 1999, 75쪽 재인용)”로 평가했다.
뒤러와 마르틴 루터의 만남은 의외의 장소에서 이루어졌다. 루터에게 보낸 지지는 그 이전으로 올라가지만 루터가 카를 5세에게 쫓겨 위기에 처했을 때, 즉 아우크스부르크에 은신해 있었을 때 그를 직접 찾아가 위로와 신뢰를 보내기도 했다.
교회의 도덕적 타락과 교황의 권력 남용, 초대교회의 순수성 회복, 교회 개혁 등의 측면에서 뒤러는 루터에게 한결같은 지지를 보냈고 그의 교회 갱신 사상을 따랐다.
아우크스부르크에 다녀온 뒤, 뒤러는 루터의 안위가 걱정됐는지 “루터가 세상을 떠난다면 누가 앞으로 우리에게 거룩한 복음을 명확하게 설명해 준다는 말인가. …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https://christianhistoryinstitute.org/dailyquote/5/17/)”고 자신의 일기(1521. 5. 17)에 적었다.
서성록 명예교수
안동대 미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