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재 선교사의 ‘아프리카에서 온 편지’ (20) 연약함에 대하여

지난 2월은 그야말로 불구덩이 같은 날씨가 계속되었다. 거기다 전기까지 자주 나가,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보통 무덥고 캄캄한 밤을 보내야 했다. 시간이 지나 웬만큼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전기가 없는 날에는 밥솥을 쓸 수 없어 항상 먹을 것을 준비해야 한다. 평소에는 잘 먹지 않은 빵을 몇 개 사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캄캄한 밤에 촛불을 켜고 빵을 먹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 보니, 근처 대학에서 공부하는 제자들이었다. 쿠미대학을 졸업하고 Africa Reformed 대학원에 진학한 로버트, 차아카2에서 목회하면서 웨스트민스터(Westerminster)대학에서 공부하는 키반자, 그들이 길을 지나다 이 근처 어디에 내가 산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는데, 하필 그 날이 전기가 나간 날이었다.
캄캄한 방에 들어오면서 이렇게 인사했다. “닥터, 어둡네요. 닥터도 이렇게 살아요?” 아마 그들은 내가 그들과 다르게 산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선교사들은 그들보다 더 많이 배우고 더 잘살고 수준도 높아서, 먹는 것도 다르고 전기가 나가도 다른 방법으로 살지 않을까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날 밤 우리는 촛불을 켜고 투박한 빵을 먹으면서, 강의실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진한 인간적 우정을 나눌 수 있었다.
선교사가 갖는 힘의 비결은 아마 ‘자기부정’일 것이다. 대부분의 선교사는 무엇인가를 버리고 떠난다. 어떤 선교사는 병든 부모를, 어떤 선교사는 좋은 직업을, 어떤 선교사는 편안한 삶과 안락한 노후를 버리고 떠난다. 나만 홀로 교회를 떠난 것이 아니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랐다는 자의식은 많은 선교사에게 존재의 근거요 힘의 근원이다.
그러나 이 자기 부정이 가끔 자기 탐닉의 수단이 되고 자기 방어의 무기가 될 때가 있다. 자기 부정은 중요하지만, 자기를 은밀히 드러내는 수단이 되어 결과적으로 자기를 괴롭히는 원인이 된다. 자기 희생 또한 매우 중요한 가치이지만, 그것 자체가 목표가 되면 또 하나의 율법이 되어 자기를 심하게 짓누르기도 한다.
자기 부정과 자기 희생의 가장 큰 폐단은 그것이 내가 쉽게 도달할 수 없는 높은 표준이 되어 그것으로 인해 날마다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산다는 것과 함께, 남에게 그 수준을 무리하게 강요해 그렇게 살지 못할 때 정죄하거나 심한 수치감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기 부정과 자기 희생은 자신을 실수하지 않을 완벽한 존재로, 다른 사람과 다른 매우 높은 수준의 도덕과 영성을 소유한 사람으로 생각하게 만들어 자신을 영웅화할 수 있다.
선교의 영웅화는 선교지에서 여러 부적용과 폐단을 낳는다. 그것은 다른 사람과의 교제를 파괴하고 선교지의 열악한 환경을 무시하여, 결과적으로 선교지를 황폐화한다.
식민주의적 선교는 나쁜 정치로부터 생긴 것이 아니라, 높은 수준의 영성을 가진 선교사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다. 처음부터 식민주의적 선교를 하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신을 영웅의 수준에 올려 놓으면, 시간이 지나갈수록 선교지는 영적 식민지가 된다.
이 잘못된 선교를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예수님의 삶을 ‘실제적으로’ 사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면서 스스로 사람 되셔서 사람들과 함께 사셨다. ‘above, in the midst’. 그는 본래 사람 위에 있으시면서(above),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사셨다(in the midst). 하나님이신 그분도 배고파하셨고 목말라 하셨고, 마지막에 버림받을 때 심한 절망감으로 통곡하셨다.
2천 년 교회사에는 영웅 같은 많은 선교사가 있었다. 그러나 영웅 같이 보이는 사람도 한결같이 죄 많고 실수 많고 연약했다.
근대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 William Carrey, 1761-1834)는 오랜 시간 불행한 가정생활을 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위해 헌신한 청교도 선교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 1718-1747)는 평생 우울증으로 고통 가운데 살았다. 진젠도르프(Nikolaus Ludwig von Zinzendorf, 1700-1760)는 금욕주의자였고, C. T. 스터드(Charles Thomas Studd, 1860-1931)는 완벽주의자였고, 월드비전을 창설한 밥 피어스(Bob Pierce, 1914-1978)는 어린 딸을 두고 선교를 떠나는 바람에 얼마 후 칼로 자해한 딸의 안타까운 소식을 들어야 했다.
2천 년 교회사를 빛낸 선교의 영웅 중에 흠이 없고 완벽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선교든 목회든 하나님의 일은 사역자의 완전함 때문에 능력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의 연약하고 부패한 육체를 통해 그리스도의 완전함이 나타날 뿐이다.
거룩은 내 속에서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골 1:27)”에게서 나오고, 선교는 “주님으로부터 거룩하게 되는 능력을 우리가 얻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있는 거룩이 나를 통해 흘러가서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Mission is not drawing from Jesus the power to be holy, it is flowing from Jesus the very holiniess that was exhibited in Him)”. ‘얻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것이다.
중세 한 도시에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성적인 죄를 범한 한 주교가 있었다. 그는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힘들어하다, 어느 날 사람들에게 고백했다. “여러분, 저를 용서해 주십시요. 저는 음란죄를 범했습니다”. 그리고 말했다. “이렇게 죄를 짓고는 주교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부로 주교직을 사임하겠습니다.”
평소 존경받는 주교였기에 사람들은 그에게 말했다. “주교님의 실수는 우리의 실수입니다. 그 죄를 우리에게 돌려 주시고 계속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십시오.” 그때 주교가 교회 입구 문턱을 엎드리며 말했다. “만일 제가 여러분의 주교로 남아 있기 원한다면 저를 밟고 지나가십시오.” 교인들은 마지못해 한 사람씩 주교를 밟고 지나가기 시작했다. 마지막 한 사람이 주교를 밟고 지나가자, 하늘에게 큰 음성이 들렸다. “네 겸손 때문에 네 죄를 사하노라.”
오늘날 한국사회, 한국교회의 가장 문제는 지도자들의 영웅화다. 웬만한 교회 지도자는 자기의 작은 실수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평소 “나는 연약한 목사입니다. 실수와 허물이 많습니다”라는 말을 고백하기도 쉽지 않다.
심지어 목사 이름을 달고 “하나님 까불지 마. 하나님 그러다 나에게 죽어”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지껄이는 사람도 있다. 그는 이미 목사가 아닐 뿐 아니라, 사실 신자도 아니다. 나이 들면 자연스럽게 보일 흰머리조차 사람들은 감추려고 바쁜 시간을 내 물을 들인다. 목회자의 생명이 검은 머리에 있다면, 아마 삼손이 가장 좋은 목회자일 것이다.
실수하지 않는 목회자, 약하지 않고 늙어 보이지 않는 강한 목회자상은 신자들의 집단적 욕구일 뿐 아니라, 목회자의 개인적 욕심에서도 나온다.
목회자가 이러니 정치 지도자들의 약점을 말할 계제가 아니다. 백성들은 나라를 위해 강한 지도자에게 표를 줄 수 있으나, 강한 지도자를 마음으로 따르지 않는다.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갖은 방법으로 감추려는 자에게는 더욱 더 그렇다.
요즘 아프리카에 사는 나까지 잠 못 들게 하는 사람도 사실은 개인과 가족의 실수와 잘못 때문에 국민들에게 더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저희 잘못입니다. 저희가 저희를 더 엄하게 다스리겠습니다. 모든 것이 제 책임입니다. 국민 여러분, 용서해 주십시오” 했다면, 그는 국민들로부터 아마 더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자기 실수를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덮으려고 최악의 방법까지 동원했다. 심지어 그는 법정에서조차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렸다. 그가 한국 사회에 남긴 메시지는, 더 이상 한국 사회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힘으로만 밀어붙이는 사람을 지도자로 세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분명하다. 목회자든 선교사든 누구든 하나님의 사람은 스스로 약해져야 한다. 바울이 가르친 대로 “약할 때 강하다(고후 11:30)”는 말씀은 우리 시대에도 통하는 위대한 역설이다.
“주여, 우리로 날마다 약해지게 하시고 다시는 우리에게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사울 같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자기를 겸손히 짓밟고 가라는 다윗 같은 사람을 지도자로 세워주소서. 우리에게 다시 용기를 주시되 우리가 연약할 때마다 다시 일어나게 하시고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시며 세상은 언제나 그 손에 못박히신 분에 의해 구원된다는 사실을 믿게 하소서. 세상을 치료하는 손은 언제나 상처받은 손이기 때문입니다.”
이윤재 선교사
우간다 쿠미대학 신학부 학장
Grace Mission International 디렉터
분당 한신교회 전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