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펜젤러·언더우드 140주년 심포지엄
새문안·정동제일 교회 공동 주최
언더우드, 선교적 에큐메니즘으로
교파 구분 없는 단일교회 추구해
아펜젤러, 장로회 전통 교육받아
신기할 정도의 신앙 이력 공통점
둘의 선교정신, 신실하게 계승을
아펜젤러(H. G. Appenzeller, 1858-1902)·언더우드(H. G. Underwood, 1859-1916) 선교사의 한국 도착 140주년을 기념하는 심포지엄이 3월 30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 벧엘예배당에서 개최됐다.
‘한국선교 140주년: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한국에서 꿈꾼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심포지엄은 두 선교사가 세운 정동제일교회와 새문안교회가 함께했다.
두 교회 목회자의 상대 선교사 평가
심포지엄에서는 먼저 정동제일교회 천영태 목사가 ‘감리회 목회자가 바라본 언더우드 선교사’를, 새문안교회의 이상학 목사가 ‘장로회 목회자가 바라본 아펜젤러 선교사’를 주제로 각각 기조연설했다.

먼저 천영태 목사는 “언더우드는 아펜젤러와 마찬가지로 복음 전파라는 목적으로 교육과 의료라는 수단을 실시해 한국 근대화에 기여했다”며 “무엇보다 타교파 선교사들과 경쟁이 아닌, 협력적·연합적 관계로 ‘선교적 에큐메니즘’을 추구했다. 이 배경에는 여러 교파를 경험한 그의 삶이 있었다. 다양한 교파 경험에서 나온 협력과 연합 정신은 자신의 교파에도 큰 이득이었다”고 평가했다.
천영태 목사는 “언더우드의 예배와 연합교회 설립은 아펜젤러와의 협력으로 진행됐다. 영아소동 대처부터 성경 번역, 성찬식, 세례 집례, 외국인 묘지 운영 등에서도 서로 돕는 관계를 유지했다”며 “두 선교사는 지방을 함께 순회하며 전도하며 ‘개척 사역의 기쁨과 슬픔’을 여러 모로 함께했다. 또 성경 출판과 문서 선교를 위해 1890년 함께 ‘조선성교서회’를 조직하고, 선교지 분할정책을 시행했다”고 전했다.
천 목사는 “언더우드는 교파 구별 없는 단일교회 형성을 꿈꿨다. 1905년 감·장 연합 ‘복음주의연합공의회’ 조직에 적극 참여해 회장을 역임하며 언론·교육·의료 기관 연합 운영을 시도했다”며 “미국 시절 ‘요란한 감리교인’이라는 그의 별명이 친근하고 반갑다. 연합하고 배우며 함께 사역한 그의 자세는 선교 초기 많은 열매를 맺는 요인이었다. 두 교단 선교사들 사이 존재했던 진정한 ‘성령의 하나 됨’은 감리교회와 장로교회뿐 아니라 모든 교역자들과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는 이들이 구하고 이뤄야 할 모습”이라고 정리했다.

이상학 목사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사이에는 서로 친화력을 가질 만한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먼저 아펜젤러의 성장 자체가 장로교 뿌리인 유럽 개혁교회의 전통에서 시작됐다. 그는 아버지의 개혁교회 전통에 따라 어린 시절부터 개혁교회 교리를 착실히 공부했고, 공립학교 졸업 후 장로교 계통 웨스트체스터 사범학교에 진학했다”며 “아펜젤러는 언더우드가 본래 인도 선교를 꿈꿨듯 일본 선교를 꿈꾸다 조선으로 오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 목사는 “아펜젤러는 선교지 도착 전 이미 전국신학교연맹 선교집회에서 언더우드를 만나 우정이 두터워졌다. 이는 하나님께서 조선 선교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것”이라며 “아펜젤러는 26세, 언더우드는 25세의 젊은 나이에 오직 주님에 대한 열정과 헌신의 마음 하나로 가장 거친 선교지에 인생을 던진 것도 공통점”이라고 했다.
그는 “140년 전 미지와 은둔과 가난의 땅에 몸을 던진 두 선교사 안에는 신기할 정도의 신앙 이력 공통점과 유사성, 신학적 교류와 연합일치사역의 사전 토대가 형성됐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정교한 하나님의 섬세하신 섭리와 포석”이라며 “둘의 아름다운 동역과 연합 사역은 그 후 한국교회의 전통인 에큐메니칼 사역의 골간이 됐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 두 선교사의 선교정신을 얼마나 신실하게 이어가고 있는가”라고 질문했다.
두 선교사 함께 꿈꾼 하나님 나라
한글 가치 발견·연구, 사전 제작
‘청년’ 처음으로 발견, 탄생시켜
성경 번역, 교파 넘어 단일 조직
두 선교사의 교육 사역과 유산
배재학당·연희전문, 중·고등 교육
장 열고 근현대사 흐름 같이 해
성경 말씀 차용한 교훈·건학이념
이어 임희국 명예교수(장신대)가 ‘두 선교사가 꿈꾼 하나님 나라’, 오영교 교수(연세대)가 ‘아펜젤러·언더우드의 교육 사역과 유산 계승’을 각각 강연한 뒤 서종원 교수(감신대)가 질의응답을 진행했다.

선교사들의 사역을 3가지로 살핀 임희국 교수는 먼저 “두 선교사는 한글의 가치를 발견하고 연구해 사전을 제작하고, 성경을 번역했다. 5년 동안 사전 제작에 몰두한 언더우드는 <영한(英韓)자전>과 <한영자전>을 만들고 1890년 4월 출판했다”며 “당시엔 맞춤법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사람마다 발음하는 대로 표기해 서로 싸울 정도였다. 그러나 사전 제작이 완료되자, 1만 개 단어가 정리됐다. 언더우드는 우리나라 언문(言文)일치, 곧 말(言)과 글(文)의 일치에 엄청난 업적을 세운 것”이라고 말했다.
임희국 교수는 “둘째는 ‘청년의 탄생’이다. 19세기 후반까지는 우리나라에 ‘청년’이란 단어 자체가 없었다. 당시 젊은이는 ‘소년(少年)’이나 ‘자제(子弟)’로 불렸다. 1897년 감리교에서 ‘청년회’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했는데, 청년이란 용어로 문명개화의 진취성을 은근히 표현했다”며 “1904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창립총회 즈음 사회 변혁의 주체로 ‘청년’이란 용어가 다시 등장했고, 장로교에서도 청년회가 조직됐다”고 밝혔다.
임 교수는 “셋째는 ‘연합과 일치의 에큐메니칼 운동’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선교사들의 선교 협력, 특히 성경 번역으로 시작됐다. 1887년 4월 ‘재한상임성서위원회(The Permanent Bible Committee in Korea)’가 장·감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모였고, 1905년 선교잡지 ‘The Korea Mission Field’를 함께 발간했다”며 “1905년 9월에는 선교사 150여 명이 ‘재한 개신교선교부 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를 조직하고, 선교사업 협력과 ‘단일 개신교 조직’을 천명했다. 연합과 협력의 에큐메니즘은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할 전통”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오영교 교수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조선 입국 후 감리교와 장로교의 전체 선교사업을 이끌 선교부(선교기지)를 건설하고, 다양한 복음사업을 펼쳤다. 특히 교육과 의료 선교를 성실히, 기술적으로 감당했다”며 “그들은 조선의 정치·사회적 상황에 민감하게 대처했고, 조선인들의 편견과 오해 등을 제거해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다. 개종이 제한된 엄혹한 상황 하에서 조선인을 이해하고, 차기 선교를 위한 정보와 지식 축적을 위해서라도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평가했다.
오영교 교수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의 교육사역은 두 사람에게 많은 시련과 동시에 커다란 보람을 안겨 줬고, 선교와 교육계에 귀중한 밀알이 됐다. 배재학당과 연희전문은 한국 중등·고등교육과 근대학문의 장을 열었고, 근현대 역사와 흐름을 같이했다”며 “두 학교는 성경 말씀을 차용한 교훈·건학이념과 기독교 학풍을 이어오고 있다. ‘섬김을 받으려 하거든 남을 섬기라(마 20:26-27)’는, 배재를 세울 때 아펜젤러가 가르친 당훈이다. 연희전문 창립이념도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1-32)’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다”고 소개했다.
오 교수는 “기독교 대학과 미션스쿨의 초창기 학풍은 아직 살아 있다. 그러나 세속화된 오늘날 기독교 대학의 위기도 심각하다. 21세기 기독교 대학의 당면 과제는 학문적 수월성과 신앙적(도덕적) 순수성 동시 지향의 어려움”이라며 “더 이상 공세적 전도를 바탕으로 한 배타주의적 학원선교는 우리 목표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학생들의 자발적 참여를 원칙으로 ‘기독교주의 실천’을 목적한 연희전문의 종교교육은 기독교 교양교육의 시초였고, 궁극적 가치 지향성을 교육하는 ‘종교적 교육’의 원형”이라고 밝혔다.
또 “오늘날 교회의 사명은 사회적으로 건강하고 의로운 자들만 모으는 것이 아니라, 병들고 소외된 자들의 회복과 구원을 돕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의 영혼을 지니고 교회 밖 불쌍한 영혼을 찾아갔던 한국 기독교 초기 모습을 재현해야 한다”며 “또 기독교 언어를 사회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변환시킬 언어적 개념과 논리를 갖추고, 획일화된 일꾼이 아닌 교회가 가진 가치와 진리를 세상 속에 말해줄 수 있는 변증가들을 키우는 일에 본격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