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덧없음 극복할 유일한 길, ‘십자가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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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록, 한 점의 그림] 한스 홀바인의 바니타스 인물화

왜곡된 형상 그려 죽음 암시해
층위 다른 삶과 죽음 대비시켜
모자·루트 등에서도 죽음 암시
덧없는 인생, ‘더 큰 세계’ 보라

▲한스 홀바인, 대사들, 1533.

▲한스 홀바인, 대사들, 1533.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Younger, 1497-1543)이 활동하던 시절 스위스 바젤에는 종교개혁의 불길이 타올랐다. 그는 종교개혁 초기에 인쇄업자들과 협업하면서 많은 삽화와 초상화를 제작했다.

하지만 1520년대 중반부터 바젤은 종교개혁의 흐름에 휩싸여 예술가들에게는 불안정한 환경이었다. 자신의 기량을 펼 수 있는 활로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러던 중 홀바인의 후원자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는 영국의 토마스 모어(Thomas More)에게 홀바인을 추천했고, 그는 잉글랜드에 체류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런던은 홀바인에게 재정적 안정과 예술적 기회를 동시에 제공해주었다.

이 시절 제작된 작품이 <대사들>(1533)이다. 이 그림은 잉글랜드 역사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당시 영국과 교황청은 헨리 8세의 재혼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었다. 헨리 8세는 이미 스페인의 공주 아라곤의 캐서린(Catheine of Aragon)과 결혼한 사이였는데, 그녀는 헨리의 형 아서가 사망하자 부왕인 헨리 7세의 강압으로 헨리 8세와 결혼하게 된다.

그런데 정작 헨리 8세가 마음에 두고 있었던 여인은 캐서린의 시녀 앤 볼린(Anne Boleyn)이었다. 교황청에서 이혼 승인을 거절당하자, 헨리 8세가 1533년 앤과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리는 바람에 교황청과의 갈등은 더 심화됐다.

당시 왕과 교황청의 대립은 국가 간 충돌이 발전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중재를 위해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가 외교사절을 영국과 로마에 각각 파견했다.

그때 영국 특사로 외교임무를 띠고 온 인물이 바로 장 드 댕트빌(Jean de Dinteville)과 조르주 드 셀브 주교(Bishop De Selve)였다. 홀바인의 그림에서도 두 사람이 정면을 응시하며 포즈를 취하고 있는데, 그들은 매우 중요한 임무를 띠고 파견된 외교관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홀바인의 관심은 영국과 교황청의 중재와 같은 정치적 현안에 있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본질적 문제를 도출하고 싶어했다. 오른쪽의 댕트빌은 화려하게 장식된 칼집을 손에 들고 있고, 프랑스의 가장 명예로운 기사훈장인 생 미셀 훈장(Saint-Michel)을 목에 걸고 있다. 그의 의상은 그가 막강한 부와 권력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해준다.

오른쪽 셀브 주교는 밀라노에서 소년기를 보냈으며 18세에 남프랑스에서 주교가 된 성직자인데, 그림을 보면 오른팔이 올려진 책의 가장자리에 라틴어로 ‘AETATIS SVAE 24’라고 적혀 있어 셀브 주교가 젊은이였음을 알려준다.

한 사람은 정치가요 다른 한 사람은 성직자였지만, 두 사람은 아마 음악과 천체학에 조예가 깊었던 모양이다. 그들이 기대고 있는 선반 위에는 그들의 관심사를 엿볼 수 있는 물건들이 놓여 있는데, 상부에 위치한 물건은 천구의와 휴대용 해시계, 사분의 등 천문학과 시간측정도구들이 놓여있다.

하단에는 지구의와 수학책, 삼각자와 캠퍼스, 한편에는 류트와 피리, 그리고 루터의 찬송가 책이 놓여 있다. 그림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유럽 일대를 휩쓴 종교개혁과 중세 말 크게 유행한 류트 등 시대의 증후를 짐작할 수 있는 기물들을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시대 분위기를 짐작하게 만든다. 특히 상부의 천문학과 시간 측정 기구들은 그들이 이성과 과학을 존중하는 당대 지성인이었음을 암시한다.

홀바인은 두 외교사절이 소임을 잘 수행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 판단할 수 있는 어떤 실마리도 제공해 주지 않는다. 홀바인이 이 그림에서 강조하려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인생의 덧없음’에 관한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이 그림을 뛰어난 걸작으로 만든 결정적 요인이 아닌가 싶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두 사람의 이름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혔지만, 지금까지도 이 그림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은 ‘인생의 덧없음’이란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을 푸는 열쇠는 화면 맨 밑바닥에 그려진 무언가에 맞아 찌그러져 있는, 기이한 ‘왜상(anamorphosis)’에서 찾을 수 있다. 홀바인은 바닥을 웨스트민스터 대사원의 것과 일치하게 만들고 그 위에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대각선으로 공중에 떠있는 왜상을 그려넣는 특이한 수법을 선보였다.

그 ‘왜상’이 어떤 것인지 파악하려면 발걸음을 살짝 오른쪽으로 옮겨야 한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두개골, 즉 홀바인이 왜상을 통해 전달하려 했던 것은 바로 ‘죽음’임을 알 수 있다. 대사들은 젊고 명망 있는 사람들이었음에도 홀바인은 파격적으로 두개골 이미지를 배치함으로써, 층위가 서로 다른 삶과 죽음을 한 화면에서 대비시키고 있다.

그림 이곳저곳을 살펴보면 죽음의 암시가 ‘왜상’에만 있는 것은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도처에 죽음을 암시하는 이미지가 매설돼 있는데, 댕트빌의 모자에도 황금으로 된 두개골이 달려 있고, 선반 위에 끊어진 루트도 사실은 욕망의 덧없음, 나아가 죽음의 불가피성을 암시한다.

인생의 덧없음과 죽음의 유한함은 당시 미술가들의 주제였다. 특히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메멘토 모리’가 플랑드르 화가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으므로, 홀바인도 그런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한스 홀바인, 게오르그 기체의 초상, 1532.

▲한스 홀바인, 게오르그 기체의 초상, 1532.

영국에서 만난 폴란드 출신 상인 <게오르그 기체의 초상>(Portait Georg Giszwe, 1532)도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다. 런던에서 무역업에 종사하던 상인은 비단으로 된 고가의 의상을 입고 있으며, 화려한 테이블보는 터키산, 벽면 금저울이나 장부일지, 열쇠, 동전 등은 주인공이 부유한 상인임을 알려준다.

머리 뒤쪽 쪽지에는 라틴어로 “이 그림은 게오르그의 얼굴과 외양을 보여준다. 눈도, 얼굴도 얼마나 생생한가. 그의 나이 34세에”라고 돼 있다. 이것은 인물의 의상이나 표정, 그리고 주위 물품들이 일정한 의도성을 가지고 배열돼 있음을 말해준다.

그런 의도성은 유리병 속 카네이션과 시계, 그리고 동전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림에서 베네치아산 유리병은 ‘쉽게 깨어질 수 있음’을 의미하고, 카네이션은 곧 ‘시들어 버릴 수 있음’을, 시계는 ‘인간의 유한성’을, 동전은 ‘물질의 허망함’을 각각 상징한다.

벽면에 고딕체로 써 있는 “Nulla Sine Merore Voluptas”란 라틴어는 ‘슬픔 없이는 기쁨도 없다’는 뜻을 지니는 말로, 이 청년의 좌우명을 알려준다. 정치인을 그리든 성직자를 그리든 상인을 그리든 그는 인간의 삶이 유한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홀바인은 그림을 통해 인생은 덧없으니, 세상 것을 쫓기보다 ‘더 큰 세계’를 바라보라고 요청한다. ‘더 큰 세계’란 <대사들>의 커튼 뒤에 가려져 있는 무언가를 바라볼 때만 알 수 있다. 화면 왼편에 위치한 커튼 가장자리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상이 자리하고 있다. 비록 구석진 곳에 자리하나 그것이 지닌 의미는 심대하다.

만일 그의 작품에서 ‘바니타스’나 ‘메멘토 모리’만 바라볼 뿐 ‘십자가’를 바라보지 못한다면, 그의 그림은 단순히 삶의 경종을 울리는 교훈적인 그림으로 머물 것이다. 그러나 홀바인은 인생의 덧없음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의 그리스도’임을 알려주고 있다.

인간이 쌓은 놀라운 업적과 부귀영화는 시간이 지나면 모두 사라지나 오직 그리스도만이 영원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듯하다.

서성록 명예교수 (안동대 미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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