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선교운동과 내한 선교사들 1] 조선을 ‘발견’한 서양 선교사들
한국 선교 140주년 행사들이 여기저기서 열리는 가운데, 한국교회사 권위자 이상규 박사님이 초기 선교사들을 돌아보는 글을 연재해 주십니다. -편집자 주
1984년 선교 100주년 기념하고
2025년 선교 140주년 기념행사?
1884년 알렌과 맥클레이 내한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1889년 호주 조셉 데이비스
남장로교(1892), 남감리교(1893),
캐나다 장로교(1898) 차례로 입국
유럽과 영미 교회 선교운동 결과
교계에서 2025년을 한국 선교 140주년이라고 말하면서 여러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한국 선교 역사를 기념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기년(紀年·기한이 되는 해)에는 고려할 점이 있다.
첫 개신교 내한 거주 선교사는 호레이스 뉴턴 알렌(Horace. N. Allen, 1858-1932)인데, 그는 1884년 입국했으니 올해는 선교 140주년이 아니라 141주년이 된다. 아마 입국한 첫 장로교 목사 선교사인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859-1916)와 첫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의 1885년 입국을 기념해 140주년을 기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알렌의 입국과 그 의미를 무시한 결과가 된다.
실제로 알렌을 한국에 파송했던 미국 북장로교는 물론이지만 한국교회도 1934년 선교 50주년 행사를 성대하게 치른 일이 있는데, 이는 언더우드가 아니라 알렌의 내한을 기점으로 한 행사였다. 또 한국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도 1985년이 아니라 1984년에 거교회적으로 시행한 바 있다, 알렌이 입국한 1884년을 기점으로 기념한 50주년과 100주년 행사였다.
이런 전례를 무시하고 금년에 선교 140주년을 말하게 된 것은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자칫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을 먼저 지적해 두고자 한다.
그런데 우리가 한국선교 140주년이나 141주년이라고 말하면서 한국 선교가 갑자기 이뤄진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1884년 알렌과 맥클레이(Robert Samuel Maclay, 1824-1907)가,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그 뒤 호주 빅토리아장로교(1889), 남장로교(1892), 남감리교(1893), 캐나다 장로교(1898) 선교사가 차례로 입국한 것은 유럽과 영미 교회에 의해 전개된 선교운동의 결과였다.
다시 말하면 18세기 이후 전개된 근대 선교운동의 결과로 극동의 작은 나라 한국에까지 기독교가 전파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선교의 역사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귀츨라프는 화란선교회 소속
순교자 토마스는 런던선교회
데이비스는 영국교회선교회
윌리엄 캐리 이후 선교 본격화
19세기 근대 선교운동 결과
기독교 세계적 종교 자리매김
우리가 근대 선교라고 말할 때, 이 말은 영국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1761-1834)가 1792년 침례회선교회(BMS)를 조직하고 자신이 동료 두 사람과 함께 인도로 떠난 사건으로 시작됐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윌리엄 캐리를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이 근대 선교운동이 어떻게 한국교회와 관련이 있는가? 우리나라가 개항하고(1876) 미국과 최초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1882) 거주 선교사들이 내한하기 전에, 조선에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이들은 근대 선교운동의 결실이었다.
1832년 조선을 방문했던 첫 내한 개신교 선교사라 할 수 있는 귀츨라프(Karl F. A. Gutzlaff, 1803-1851)는 화란선교회(Netheland Missionary Society, 1797), 두 번째 내한 선교사인 저메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39-1866)는 런던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 1795) 소속이었다.
후에 호주 빅토리아장로교 첫 선교사로 1889년 입국한 데이비스(Joseph H. Davies, 1856-1890)는 영국교회선교회(Church Missionary Society, 1799) 소속으로 일했던 선교사였다. 또 1900년 부산에 도착한 호주 빅토리아장로교 겔슨 엥겔(Gelson Engel, 1868-1954)은 바젤선교회(Basel Mission, 1815) 출신이었다. 이런 점만 보더라도 근대 선교운동이라는 연쇄관계에서 한국 선교가 시작됐음을 알 수 있다.
미국 교회 또한 마찬가지이다. 미국에서 첫 해외 선교단체가 만들어진 것은 1810년 회중교회 미국해외선교회(ABCFM)였고, 첫 선교사 5명을 인도에 파송한 것은 1812년이었다. 이 선교단체 또한 근대 선교운동의 결실이었다. 이렇게 볼 때 한국에 선교사들이 입국하게 된 것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라, 18세기부터 전개된 근대 선교운동의 결과였음을 알 수 있다.
윌리엄 캐리는 근대 선교운동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윌리엄 캐리 이전에도 선교를 강조한 이들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캐리 이후 비로소 영어권 세계 선교사업이 본격화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윌리엄 캐리는 1792년 ‘이방인의 개종을 위해 사용해야 할 도구에 관한 연구(An Enquiry Into the Obligation of Christians to Use Means for the Conversion of the Heathen, 1792)’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선교단체 조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당시에도 교회가 있었지만, 교회가 선교에 관심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선교에 관심을 가진 개인이나 집단의 선교단체 조직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책 출판과 더불어 1792년 10월 케터링(Kettering)에서 창립된 선교회(침례교선교회, BMS)는 영국과 이후 기독교 역사에 선교적 각성을 준 신기원을 이룬다. 1800년대까지는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아니었다. 그러다 19세기 선교운동의 결과 기독교는 세계적인 종교로 자리하게 된다.
개신교 선교 성공 6가지 요인
1. 새로운 사상적 변화 2. 종교 환경 변화
3. 정치적 상황 변화 4. 18세기 복음주의 부흥운동
5. 다양한 선교단체 설립 6. 식민주의와 산업화
<선교사 열전> 등을 쓴 루스 터커(Ruth A. Tucker, 1945-)는 19세기 개신교 선교를 성공적으로 이끈 6가지 요인을 분석했다. 첫째는 새로운 사상적 변화이다.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에 대한 염증으로 낭만주의가 대두했고, 이 새로운 변화는 선교운동에도 영향을 줬다는 것이다. 둘째, 종교 환경의 변화도 선교에 영향을 줬다. 비기독교 종교의 몰락과 무기력은 기독교 확장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다. 셋째, 정치적 상황 변화도 선교환경에 도움을 주었다고 보았다.
넷째, 18세기 복음주의 부흥운동도 큰 영향을 준 것으로 해석했다. 이 복음주의 운동은 기독교인들에게 세계 선교의 비전을 부여했다. 다섯째, 다양한 선교단체 설립은 선교운동의 구체적 실행을 가능케 했다. 마지막 여섯째로는 식민주의와 산업화의 영향을 들었다. 식민주의와 선교의 관계는 여전히 논쟁적 주제로 남아 있지만, 선교의 진전에 영향을 준 점은 부인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인도로 간 윌리엄 캐리의 선교 사역과 선교보고는 유럽과 미국 교회에 선교적 각성(missionary awakening)을 불러 일으켰고, 선교단체 조직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이후 많은 선교단체가 조직된다.
대표적 경우가 1795년 런던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였다. 런던선교회는 이방 땅에 영원한 복음을 전한다는 고매한 목적을 가지고 시작됐다. 이 선교회 첫 30명의 선교사는 1796년 남태평양 타히티(Tahiti)로 파송됐다. 30명의 선교사 중 안수 받은 선교사는 오직 4명뿐이었고, 나머지는 각종 기술자였다.
그 후 아프리카 시에라리온(Sierra Leone), 인도, 중국이 주요 선교지였다. 중국의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1782-1843), 후에 우리나라까지 왔던 토마스(Robert J. Thomas)도 런던선교회 소속이었다. 런던선교회는 창립 후 1896년까지 948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1799년 헨리 벤(Henry Venn)과 클래팜 교구목사인 그의 아들 존 벤(Jonh Venn, 1759-1813), 노예제도 폐지를 주창하였던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그리고 ‘가정 성경(Family Bible)’ 편집자 토마스 스콧(Thomas Scott) 등이 중심이 돼 영국교회선교회(CMS)가 창립됐고, 1865년 허드슨 테일러에 의해 중국내지선교회(CIM)가 창립됐다. 중국내지선교회는 창립된 지 20년이 안 되어 중국 모든 성에 선교사를 파송했을 정도였다.
그 외에 1796년 스코틀랜드와 글라스고선교회(Scotland and Glasgow Mission)가, 1797년 화란선교회가, 1799년 영국교회선교회(CMS)가, 1804년에는 대영성서공회(BFGF)가, 1815년에는 바젤선교회(Basel Mission)가, 1865년 중국내지선교회(CIM)가 각각 창립된다. 그래서 교회사학자 라투렛(Kenneth S. Latouette, 1884-1968)은 19세기를 ‘위대한 선교의 세기(The Great Century of Missions)’라고 불렀다.
이런 영향으로 미국에서도 선교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 소개하고자 한다.
이상규 박사
백석대학교 석좌교수,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