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학술발표회
서구-비서구 이분법 대립 구도?
복합적 역학 충분히 포착 못해
라틴아메리카 출신 지도자들
사회 정의 포함 총체적 선교관
그들 사회-정치적 상황과 연관
로잔 언약, 복음전파 긴급성과
사회적 책임 모두 담아내 해석
차이와 갈등 지속적 발생시켜

지난 1970-1980년대 한국교회가 세대에 따라 로잔 운동을 ‘세계 복음화’와 ‘사회적 책임’이라는 각자의 방식으로 다르게 수용해 왔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5일 비대면(줌)으로 진행된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433회 학술발표회에서 서동준 박사는 ‘한국 로잔 운동 수용사(1974-1988)’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로잔 운동(The Lausanne Movement)이라 불린 복음주의 연합 운동은 1974년 7월 16-25일 스위스 로잔에서 개최된 세계 복음화 국제대회(The International Congress on World Evangelization, 이하 1차 로잔 대회)로 시작됐으며, 지난 2024년 5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에서 개최된 ‘서울-인천 로잔 대회’로 4회째를 맞았다.
서동준 박사는 “1차 로잔 대회는 참석자들의 국가적·교단적 다양성과 그 영향력으로 많은 언론과 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참가한 복음주의 지도자 2,473명 중 1천 명 이상이 비서구권 출신이었고, 다양한 교파의 한국 복음주의자 65명도 참가했다”며 “이 같은 중요성으로 1차 로잔 대회는 많은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돼 왔고, 특히 미국 중심의 복음 전파 위주 선교관에 강력한 도전을 제기한 라틴아메리카 출신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의 역할과 기여가 주된 관심이었다”고 전제했다.

서 박사는 “이에 로잔 대회를 서구와 비서구 간 대립 구도로 이해하는 경향이 생겼으나,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는 대회의 복합적 역학을 충분히 포착하지 못한다. 비서구 출신 참가자들 중 미국의 선교관을 공유하는 이들도 있었고, 한국 참가자들도 그랬기 때문”이라며 “‘로잔 운동의 한국적 수용’이라는 주제도 많이 연구됐지만, 기존 연구들은 대체로 1980년대와 그 이후, 연구 대상은 ‘사회적 책임’에 관한 메시지를 수용한 젊은 복음주의자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고 취지를 전했다.
그는 “1차 로잔 대회를 기획한 빌리 그래함은 개회 연설에서 ‘모든 참가자들이 하나 되어 반드시 수행해야 할 단 하나의 과업은 다름 아닌 복음화’라며 그 중요성과 긴급성을 역설했다. 그가 사회적 책임의 중요성을 등한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WCC로 대변되는 진보적 선교운동이 선교적 우선성을 복음전파로부터 이동시키려는 시도에 반대했다”며 “그러나 그러한 그의 의도에 대한 강력한 도전은 역설적으로 그가 참가자 선정 과정에서 각별히 공들인 비서구권 지도자들, 특히 라틴아메리카 출신들에 의해 제기됐다”고 밝혔다.
서동준 박사는 “라틴아메리카 출신 지도자들은 선교를 복음 전파만으로 국한시키는 것을 비판하고, 사회 정의 문제를 포함하는 보다 총체적 선교관을 지향했다. 이러한 선교적 접근은 그들이 처한 사회-정치적 상황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었다”며 “이러한 총체적(통전적) 선교관에 기반해, 라틴아메리카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은 1차 로잔 대회에서 선교를 복음전파에만 국한시켜선 안 되며, 사회 정의 이슈까지 넓혀 보다 포괄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은 총체적 선교 개념을 로잔 대회 공식 문서인 ‘로잔 언약’에 반영시켰다. 이 과정을 통해 로잔 언약은 복음전파의 긴급성과 우선성이라는 전통적 선교관과, 사회적 책임의 선교적 본질성 모두를 담아내게 됐다”며 “그러나 이러한 포괄성은 로잔 언약의 해석상 차이와 갈등을 지속적으로 발생시켰다. 로잔 대회 이후 그로 인한 갈등이 지속되자, 로잔위원회는 ‘교회의 총체적 성경적 선교를 증진하되, 이 희생적 봉사의 선교에 있어 복음전도가 우선성을 가진다’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그럼에도 해석 차이와 갈등은 지속됐고, 한국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1970년대 주류 복음주의자들,
로잔 언약 세계 복음화 중심
1980년대 젊은 복음주의자들,
사회적 정의 추구 중심 접근
당대 사회적·정치적 맥락 속
로잔 언약 중요성 새롭게 조명
그들 중심 ‘재발견’ 적극 보급
서 박사는 “1차 로잔 대회 한국 대표단은 위원장 조종남 서울신대 교수를 필두로 다양한 교파의 복음주의 지도자 65명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복음전파의 긴박성과 타문화권 선교 중요성을 강조하는 전통적 선교관을 표방, 빌리 그래함 중심의 미국 보수 복음주의자들의 선교관에 더 가까웠다”며 “로잔 대회 한국 참가자들은 WCC와 진보 기독교인들의 박정희 유신에 대한 인권 활동에 반박했고, 세계 복음화에 있어 한국이 맡은 ‘특별한 책무’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로잔 운동을 해석하고 수용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처럼 주류 복음주의자들은 로잔 운동이 제기한 다양한 의제들 가운데 ‘세계 복음화의 긴급성’과 ‘한국교회 중요한 역할’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수용했다. 이는 복음 전파 중심의 전통적 선교관과 당시 급격한 경제 성장과 교세 증가로 인한 자신감 반영이었다”며 “하지만 1980년대 들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로잔 운동을 다르게 수용하는 방식이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발표했다.

서동준 박사는 “이들의 접근방식은 1차 로잔 대회 당시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의 목소리처럼 로잔 운동 핵심을 ‘사회적 정의 추구’에서 찾았다. 이는 ‘로잔 언약’ 수용 시기에 관한 논쟁과 긴밀히 연결돼 있다. 당시 젊은 복음주의자들은 ‘로잔 언약’이 1980년대에 비로소 한국 교계에 소개됐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라며 “그들의 주장과 달리, 1974년 로잔 대회 직후부터 로잔 언약을 한국 교계에 소개하려는 노력은 분명히 존재했다. 결국 1980년대 로잔 언약이 적극 수용된 현실은 로잔 언약의 ‘발견’보단 ‘재발견’에 가깝다. 당대 사회적·정치적 맥락 속에 로잔 언약의 중요성이 새롭게 조명되면서, 그들을 중심으로 한국 교계에 적극 보급된 것”이라고 풀이했다.
서 박사는 “1970년대 조종남·손봉호·김명혁 등이 로잔 언약에 담긴 총체적 메시지를 소개하면서도 복음전파의 우선성을 강조했다면, 1980년대 젊은 복음주의자들은 로잔 언약을 한국 복음주의 교계 안에서 등한시되던 ‘사회 정의 추구’의 신학적 토대와 정당성을 제공하는 문서로 이해했다”며 “그들은 로잔 언약이 ‘교회의 선교’를 복음전도를 통해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수적 증가로 축소하려는 모든 시도에 치명타를 가했고, 한국교회가 ‘하나님 나라’라는 성경의 신학적 기반 위에서 총체적 선교를 수행할 때만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이원화하지 않고 함께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했다.
복음주의 청년·학생협의회
결성해 공정선거 감시 운동
총체적 선교 관점 정의 추구
다양한 해석·실천 경합의 장
그는 “젊은 복음주의자들의 이러한 인식은 구체적 사회참여 활동으로 이어졌는데, 이는 ‘직업’을 통한 간접적 사회참여를 강조하던 1970년대 로잔 언약 소개자들과 대조를 이뤘다”며 “대통령 직선제 개헌 후 ’복음주의 청년·학생협의회’를 결성해 공정선거 감시 활동을 전개하면서, 개인주의적 신앙에 안주해 사회·정치적 현실을 무시한 채 방관적 자세만을 취하고 있는 한국의 복음주의 교회를 비판했다. 이들에게 공정선거 감시 운동은 ‘복음의 총체성 회복, 하나님 나라의 의(義) 드러냄’이었다”고 말했다.

서 박사는 “이들에게 로잔 언약은 복음전파에 종속된 사회적 책임이 아닌, 총체적 선교 관점에서 사회책임과 정의 추구를 강조하는 문서였다. 이들은 직접적 사회참여 방식을 선택해 사회 구조 변혁에 적극 관심을 보였다”며 “로잔 언약이 1980년대에 ‘발견’됐다는 이들의 주장은 단순한 사실관계 오해를 넘어, 로잔 언약에 대한 새로운 해석 필요성을 암묵적으로 드러냈다. 이러한 해석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이라는 구체적 상황 속에서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고, 한국 복음주의 운동 내에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는 중요한 기반이 됐다”고 정리했다.
끝으로 “한국에서의 로잔 운동 수용은 단일한 방향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각 수용 주체의 세대적 배경과 그들이 더 중요시한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됐다. 이러한 다양성은 칼 헨리가 지적한 ‘교회의 사회정치적 참여를 둘러싼 현대 복음주의 내의 갈등과 모호성’이 한국적 맥락에서 어떻게 표출됐는지 보여준다”며 “로잔 언약 자체가 가진 복합적 성격은 해외에서처럼 한국에서도 복음주의 내 다양한 목소리와 입장들이 공존하면서도 갈등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이는 복음주의 운동이 단일하고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다양한 해석과 실천이 경합하는 역동적 장(場)임을 확인시킨다”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