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조선, ‘미국’ 선교사들이 주로 내한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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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선교운동과 내한 선교사들 2] 세계 선교의 주도권, 미국으로

한국 선교 140주년 행사들이 여기저기서 열리는 가운데, 한국교회사 권위자 이상규 박사님이 초기 선교사들을 돌아보는 글을 연재해 주십니다. -편집자 주

영국 이어 미국도 선교운동 시작
우리 세대에 세계를 복음화하자
학생자원운동, 아시아 선교사로
이전까지 영국이 세계 선교 주도,
1900년 이후 미국 주도로 바뀌어
美 국제사회 영향력 확대 의미도

▲SVM이 태동한 1886년 7월 미국 매사추세츠주 노스필드 ‘헐몬산 학교’ 대학생 여름수양회 기념촬영 모습. ⓒthetravelingteam.org

▲SVM이 태동한 1886년 7월 미국 매사추세츠주 노스필드 ‘헐몬산 학교’ 대학생 여름수양회 기념촬영 모습. ⓒthetravelingteam.org

미국에서도 선교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시원(始原)은 청년 대학생들의 각성이었다. 미국 동부 메사추세츠주 윌리암스 타운에 있는 윌리엄스대학에 재학하고 있던 사무엘 밀즈(Samuel J. Mills, 1783-1818)는 영적 갈망을 가진 동료들과 함께 작은 기도회를 시작했다. 이들은 주로 수요일과 토요일 오후 대학 뒤편 후시크강 언덕이나 대학 인근 숲속에서 모였다.

이 기도회가 후일 헤이스틱 운동(The Haystack movement)이라 불리는 기도운동과 ‘형제단’이라 불리는 선교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이 작은 기도회가 발전해, 미국에서의 해외 선교단체를 조직하게 된다.

즉 청년대학생들의 헌신과 열정으로 미국 대학생들 사이 선교 각성이 일어나고, 그 결과 1810년 회중교회에서 ‘미국해외선교회(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 ABCFM)’가 조직돼 미국 첫 해외선교 조직이 된 것이다.

2년 후인 1812년 2월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 1788-1850)과 사무엘 뉴웰(Samuel Newwell), 사무엘 노트(Samuel Nott), 골든 홀(Gorden Hall), 그리고 루터 라이스(Luther Rice, 1783-1836) 등 5명의 선교사가 인도로 파송됐다. 미국 교회 첫 해외 선교사였다. 인도까지 선편으로 4개월이 소요됐고, 이들은 1793년부터 인도에서 사역하고 있던 윌리엄 캐리와 동역했다.

이런 시작과 함께 1886년 미국에서 일어난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SVM)’은 미국 해외선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SVM은 미국 대학생들에게 복음과 선교에 대한 도전을 주기 위해 A. T. 피어선 박사(Arthur T. Pierson)가 드와이트 무디(Dwight L. Moody)와 함께 설립한 해외선교를 위한 학생선교 운동 단체이다.

이 운동의 발전에는 프린스톤대학 졸업생이었던 로버트 월더(Robert P. Wilder)의 선교 비전, 위대한 설교자 드와이트 무디의 영적 감화력, 그리고 당시 코넬 대학 학생이었던 존 모트(John R. Mott)의 조직력이 크게 작용했다.

▲평택대에 위치한 SVM 주창자 피어선(Arthur T. pierson) 박사의 동상. ⓒ크투 DB

▲평택대에 위치한 SVM 주창자 피어선(Arthur T. pierson) 박사의 동상. ⓒ크투 DB

이들은 ‘우리 세대에 세계를 복음화하자(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라는 캐치프레이즈로 미국에서의 선교운동을 주도해, 여러 대학에서 학생자원운동이 일어났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에 온 대부분의 미국, 캐나다, 호주 출신 선교사들은 학생자원운동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었다. 1902년 학생자원운동을 통해 해외 선교사가 된 이들은 중국 56명, 인도 37명, 일본 26명, 한국 10명, 필리핀 10명, 멕시코 7명 등이었다.

내한한 마포삼열(Sameul A. Moffett), 기포드(Daniel L. Gifford). 배위량(William M. Baird), 이길함(Graham Lee), 소안론(William L. Swallen), 모삼률(S. F. Moore), 안의와(James E. Adams), 노세영(Cyrill Ross), 편하설(Charles Bernheisel), 방위량(William M. Blair), 곽안련(Charles Allen Clark) 등은 학생자원운동의 영향을 받은 이들로서, 맥코믹신학교 출신이었다. 이처럼 학생자원운동은 1940년의 토론토 대회에 이르기까지 선교 사역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세계선교를 이전까지는 영국이 주도했으나, 1900년 이후 미국이 주도했다. 1900년 개신교 총 선교사 수는 1만 3천 6백여 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중 영국 출신이 5천 9백여 명이었고 미국 출신은 4천여 명에 달했다. 이 통계를 보면 영어 사용권 선교사 수가 전체 개신교 선교사의 4분의 3을 점하고 있었고, 미국 출신 선교사 수가 급증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1915년 미국 선교사의 수는 1900년의 두 배가 됐고, 1925년에는 1만 4천여 명으로 증가해 전 세계 선교사 수의 50%를 넘었다. 말하자면 1900년 이후 해외 선교 주도권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넘어갔다. 이것은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노스필드 ‘헐몬산 학교’의 SVM 기념비. ⓒ위키

▲노스필드 ‘헐몬산 학교’의 SVM 기념비. ⓒ위키

미국인들 실용주의, 선교 영역도
선교 동원, 교육, 본국 사역까지
광범위한 교회적 사역 이해 나서
매클레이와 알렌 조선 방문 시작
1884-1984년 100년간 내한했던
선교사 2천 명 중 美 국적이 70%

미국인들의 실용주의적 사고와 그 정책은 선교 영역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선교사의 사역을 선교지 사역뿐 아니라 선교를 위한 호소, 선교 교육, 그리고 본국 사역 등 보다 광범위한 교회적 사역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또 선교사 안식년 제도도 시행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 미국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 수는 3만 9천여 명에 달했고, 단기 선교사 수는 3만여 명이었다.

미국이 세계 선교의 주도권을 행사했다는 사실 외에 또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복음주의 계통의 개인이나 교회, 단체가 선교를 주도했다는 점이다. 미국 교회의 지난 40년간 선교 사역에서 절대 다수 선교사들이 복음주의 계통의 교회들에서 나왔다.

예컨대 1930년대 미국 선교사 1만 2천여 명 중 약 40%가 복음주의 배경에서 나왔고, 1980년대 중반 미국 선교사의 약 90%는 복음주의 교회 출신이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대로, 1900년 이후 미국 교회는 세계 선교를 주도했다. 그 결과, 미국 교회는 1880년대 이후 한국 선교를 주도하게 된 것이다.

미국 장로교회는 1830년대부터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에 선교사를 파송했는데, 조선의 개방정책에 자극을 받아 조선에도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녹스(George W. Knox)나 리드(Gilbert Reid) 같은 선교사들은 선교본부와 선교잡지에 조선 선교를 청원하는 편지를 썼다.

감리교 가우처 대학 학장이었던 가우처(John F. Goucher)는 한미수호통상조약 결과 미국으로 파견된 견미(遣美)사절단 대표인 민영익과의 면담을 통해 한국 선교의 가능성을 확신하고, “은둔의 나라 한국에서도 선교사역이 시작되기를 바란다”며 2천 달러의 기부금을 내놓기도 했다.

▲(왼쪽부터) 1884년 조선을 찾은 알렌 선교사와 매클레이 선교사. ⓒ위키

▲(왼쪽부터) 1884년 조선을 찾은 알렌 선교사와 매클레이 선교사. ⓒ위키

그 결과 일본 주재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Robert S. Maclay) 목사가 1884년 6월 24일부터 7월 4일까지 2주간 조선을 방문해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그런가 하면 일본에 있던 이수정(李樹廷, 1842-1886)은 ‘한국의 실정’이라는 글을 <세계선교 평론(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에 기고하고 조선 선교를 호소했다. 이 글이 발표된 후 북장로교 선교부 엘린우드(F. F. Ellinwood)는 조선 선교의 긴박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런 호소가 ‘마케도니아의 부름’이 되어, 1884년 이래 한국에 여러 선교사들과 선교단체들이 입국하기 시작했다. 즉 북장로교 선교부는 1884년 봄 의사 헤론(Dr. John W. Heron)을 한국에 파송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한국 선교사로 지명된 첫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미 상하이(上海)에 와 있던 알렌이 1884년 9월 14일 상하이를 출발해 9월 17일 부산을 거쳐 9월 20일 제물포를 경유해 서울로 입경함으로써 내한한 첫 거주 선교사가 되었다.

이후 한국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한 미국교회 선교부는 미국 북장로교(1884), 북감리회(1885), 미국 남장로교(1892), 남감리교(1893) 등이었다. 그리고 호주장로교(1889), 침례교(1889), 영국 성공회(1890), 캐나다 장로교(1898) 등이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게 된다.

이처럼 한국에서도 미국 교회가 한국 선교를 주도하게 된다. 1884년부터 1984년까지 내한한 2천여 명의 선교사 가운데, 미국 국적 선교사는 약 70%에 달한다. 그렇다면 내한한 선교사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계속>

이상규 박사
백석대학교 석좌교수, 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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