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기도제목 4가지, 모두 응답하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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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자 신석기 장로 신앙 간증문

부산 지역에서 국내와 전 세계를 향해 5개국어 전도지와 3개국어 전도용 조끼를 만들어 복음을 전하고 있는 신석기 장로의 간증문을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신석기 장로.

▲신석기 장로.

“당신은 하나님을 믿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이 오직 유일(唯一)한 신(神)이라고 확실하게 믿을 수 있습니까?”
“당신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한 결과는 과연 무엇입니까?”

누군가 제게 이렇게 묻는다면, 저는 어렴풋이 긴가민가하는 마음으로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하나님에 대해 대답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체험과 그에 따른 증거들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인생에 있어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없었다면, 아니 하나님이라는 ‘실존적 신’이 없었다면 곧 제 인생도 없는 것과 일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존재 자체가 실존적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이고, 그 은혜 가운데 지금껏 인생을 살아왔고, 지금도 그 분의 능력으로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친구를 따라 교회를 다니기 전, 20세까지 제 어린 시절은 기억조차 하기 싫은 무기력하고 지렁이보다 못한 존재였습니다. 저는 1948년 경남 사천군 정동면 풍정리에서 태어나 3세 때 6.25 전쟁을 겪었습니다. 그때 사천군은 격전지로 매일 폭탄이 떨어졌지만, 당시 저희 집은 초가집이라 방음이 전혀 되지 않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갑자기 폭탄의 굉음 소리가 나면 영문도 모른 채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 방구석에서 움크린 채 떨고 있었습니다.

세 살배기 유아로서 이러한 전쟁의 공포가 하루이틀도 아니고 거의 매일 이어지다 보니, 공포감에 질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이 이어졌습니다. 이로 인한 공포증 때문인지, 청년 시절까지 어두워지면 밖을 나가지 못했습니다.

저희 가정은 결국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4세 때 누나와 여동생, 저까지 3명이 콜레라 전염병에 감염돼 누나와 여동생은 죽고 저 혼자만 생존했습니다. 당시 병원이라고는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고, 약도 먹지 못했습니다. 그로 인해 기력이 쇠해져 혼자 외갓집에 보내졌는데, 외삼촌들이 저를 위해 매일 쥐를 잡아 구워줘 기력을 회복했습니다.

5세 때는 동네 아이들과 공기놀이를 한다고 땅바닥에 둘러앉아 놀고 있었는데, 큰 아이들이 ‘리어카 수레’를 밀고 다니는 놀이를 하다 그 수레가 제가 앉아 있는 쪽으로 굴러와 쇠로 된 축이 제 허리를 들이받았고, 어린 나이에 척추를 다쳤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은 병원에 데려가지 못했고, 제가 보는 앞에서 요강단지를 놓고 여동생이 똥을 누게 한 뒤, 그 요강에 막걸리를 부어 똥과 함께 섞은 뒤 삼베로 짜서 ‘똥술’을 만들어 제게 먹도록 했습니다. 그 순간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어머님이 제가 안 볼 때 똥술을 만들어 주시면서 “이것은 허리를 낫게 하는 약이니 먹으라”고 했다면, 냄새는 좀 이상하지만 억지로라도 먹었을 텐데, 눈앞에서 똥술을 만들어 먹으라고 하시니 안 먹을 수도 없고, 그 순간은 척추 통증보다 더 큰 정신적 고통을 받았습니다.

유아 때부터 전쟁의 공포와 콜레라 감염 등으로 영양실조 상태였는데 척추 사고까지 터져 심신이 쇠약해졌고, 후유증으로 ‘야경증’이 생겨 공포감에 밤낮으로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던 차에 ‘야뇨증’까지 생겼습니다. 밤에 잠만 자면 이불에 오줌을 싸게 됐고, 그 수치심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 뒤에는 연탄가스에 중독돼 죽음의 고비를 넘기기도 하고, 독감에 걸려 한 달 이상 일어나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신석기 장로가 제작한 전도지 중 일부.

▲신석기 장로가 제작한 전도지 중 일부.

어린 시절은 이렇듯 무기력하고 우울한 데다, 너무 어려운 가정환경으로 끼니를 제대로 해결할 수조차 없을 정도였습니다. 당시 저희 집은 돈 만 원이 없어 동네 사람에게 5부 이자로 빌리면서 차용증서를 써줬는데, 이 차용증서를 아직 2장이나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제게 교회를 가자고 해서 무심코 따라가 예배를 드렸는데, 예배 가운데 설교 말씀이 마음에 새겨졌고 희망도 느껴져서 다음 주일에도 저 혼자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친구는 그 뒤로 교회를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때부터 매주 교회를 가는 길이 기쁨이었고, 예배는 희망이 되었습니다.

교인들이 성경책을 들고 교회를 다녔지만, 저는 성경책을 살 돈도 없었고 부모님은 불교와 유교 풍속에 젖어 계셨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집안의 종손으로 제사를 철저하게 드려왔기에, 아버지를 이어 제사를 드려야 하는 제가 교회를 다니면 제사가 단절되니 제가 교회 다니는 것을 극구 반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말을 듣지 않자 심한 핍박이 시작됐습니다.

이렇듯 부모님께 성경책을 사달라고 할 수도 없었고 살 형편도 되지 않았기에, 궁리 끝에 참새 830여 마리를 잡아 팔아서 성경책을 구입했는데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남들보다 성경을 더 많이 읽게 됐고, 말씀을 읽는 가운데 성령의 감화와 감동이 쌓이면서 신앙에 뜨거운 열정이 불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일도 남들보다 더 열심히 감사하는 마음으로 섬기면서, 주일학교 교사 등으로 헌신적 봉사를 했습니다.

하지만 가정의 경제적 여건이 너무나 어려워져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없게 되고 입대 나이도 점점 가까워져서, 군에 입대하면 밥을 공짜로 먹여주니 군에 가서 장기 복무를 하면 평생 밥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군에 지원하려고 병무청에 가서 공군 지원서를 쓰고 필기시험에 합격한 후 대전 공군교육사령부에 입대했습니다. 신체검사 후 2주 동안 내무반에서 대기했는데, 마지막 날 담당 군인이 와서 전국에서 모인 지원자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제 이름을 불렀습니다. 앞으로 나오라고 해서 나갔더니, “집으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귀가 조치돼 어린 나이에 오기가 생겨 다시 공군에 지원했지만, 다시 2주 후 귀가 조치됐습니다. 세 번째로 지원해도 입대가 되지 않았고, 결국 육군 보안대 1번 39사단으로 영장이 나와 입대했지만 또 다시 귀가 조치되고 말았습니다. 5번이나 입대했지만 군인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이후 하도 이상해서 보건소에서 신체검사를 했더니 폐결핵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곧바로 법정 전염병 환자로 등록됐고, ‘파스와 아이나’라는 약을 무료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신앙에 뜨거운 열정이 있던 때라 ‘교회 다니는데 이 약 안 먹는다고 죽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 국가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약을 밭에 집어던지고 약을 끊어버렸습니다.

그 뒤 신앙생활에 깊이 몰두하면서 은혜를 받아, 목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감리교 목원대학교에 지원했습니다. 합격통지서를 보니 등록금이 13만 5천 원 정도였습니다. 당시 집이 가난해 1만 원도 없어 차용증서를 써주고 빌리는 처지였는데, 13만 5천 원은 상상할 수 없는 거금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부모님은 교회 다니는 것을 극구 반대하셔서 성경책이 아궁이에도 들어가고 마당에도 던져지던 상황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것 자체도 반대하시는데 ‘목사가 되겠으니 등록금을 달라’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을 뿐더러, 집안 형편에도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학장님에게 편지를 써서 학교에서 첫 등록금만 배려해 주시면 4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서 공부를 하고 싶다고 사정했습니다. 학장님의 답장은 ‘첫 등록금만 내면 4년 동안 근로 장학생으로 대우해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첫 등록금 마련은 도저히 불가능해, 신학을 포기했습니다.

시골 사람들은 군대를 안 가려고 손가락을 작두로 절단하던 시절 5차례나 군에 지원해도 갈 수 없었고, 신학교를 가려 해도 등록금을 낼 수 없었고, 전염성 폐결핵으로 사회생활도 못하는 등의 좌절 가운데 하나님께서 공무원 시험에 도전하도록 인도해 주셔서, 공직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폐결핵 약도 먹지 않았는데 주님께서 치유해 주셨고,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자매와 결혼도 하게 해 주셔서 새로운 삶의 길이 열리게 됐으며, 부모님도 주님을 영접하고 동생들도 교회를 다니는 믿음의 가정으로 세워졌습니다.

이후 30대 후반에 장로가 되어 교회를 섬기며 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만, 복음을 위한 사명자로서 살지 못했습니다. 1970-1980년대 공직자 급여는 박봉에다 워낙 맨손으로 출발한 가정이라, 가족 6명이 생활하기엔 경제적 염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신앙의 우선순위’가 왜곡돼 가던 중, 주님께서 어느 날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이게 장로가 아니다.” 이 말씀을 듣고, 갑자기 제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장로 직분을 내려놓아야겠다고 결심했고, 당회도 휴무하면서 깊은 성찰과 참회에 몰두했습니다.

▲신석기 장로가 제작한 전도지 중 일부.

▲신석기 장로가 제작한 전도지 중 일부.

약 3년 정도 ‘영성 타임’을 갖던 중 기도 가운데 주님께서 교훈해 주시는 것들을 메모하기 시작했는데, 그 자료가 영성훈련 교재가 되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 뒤 신앙생활 가치관도 바뀌었습니다. 경제적 안정이 삶의 우선순위였는데 180도 달라져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으로 전환됐습니다. 이 시기 성전 건축이 시작돼 건축헌금을 해야 했습니다. 작은 평수 서민 아파트에 살면서 50% 정도 대출이 있었는데, 하나님 우선주의 신앙을 결단한 때라 그 시점에서 제 전 재산을 계산해 건축헌금으로 작정하고 마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눈물나는 사정도 있었고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도 체험했습니다. 이때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이 신앙적 가치관으로 확고하게 자리잡는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 하나님 우선주의 신앙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 뒤 새로 부임하신 목사님이 전 교인에게 일천번제 헌금을 권하셨습니다. 이때 또 다시 두 번째로 전 재산을 계산해 1천으로 나눠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여든이 다 되어 가는 지금, 인생 마지막으로 얼마 남지 않은 전 재산을 주님의 복음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러한 신앙적 결단에 주님께서 긍휼히 여기셨는지, 어릴 적 마음의 소원으로 품었던 것들을 주님께서 모두 성취해 주셨습니다. 은혜를 체험하면서 너무 신비롭고 주님께 대한 감사가 절로 고백됩니다. 어릴 적 마음의 소원은 ①건강 ②끼니 해결 ③군인 되기 ④목사 되기 등 4가지였습니다. 다음은 그 비전 성취 이야기입니다.

①건강: 어릴 적 병약한 몸으로 죽음의 고비를 몇 번 넘기기도 하고, 집안 내력이 단명으로 조실부모하던 집안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제 20대 때, 어머니는 제 30대 때 돌아가셨으며, 할아버지·할머니는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모두 일찍 돌아가셔서 어릴 적 할아버지·할머니라는 단어를 단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집안 내력에도 지금까지 80 가까이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입니다.

②끼니: 집이 가난해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없어 공짜로 밥을 먹기 위해 군에 다섯 차례나 입대를 시도했지만, 하나님은 제가 죽을 때까지 밥을 굶지 않도록 국가에서, 그리고 보험회사에서 밥값이 자동으로 입금되도록 완벽하게 해결해 주셨습니다.

③군인: 앞서 말씀드렸듯 다섯 차례나 입대를 시도했지만 군인이 되지 못해 자존심이 엄청 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병으로 군에 입대하지 못한 한을 풀어 주셨고, 남들이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존귀함으로 위로해 주셨습니다.

군대를 가지 않았음에도 전쟁 업무를 수행해 도지사 표창과 장관 표창을 받았고, 육군 제25사단장과 함께 신병수료식에서 무개차를 타고 신병들로부터 사열을 받기도 했으며, 해병대 2사단장과 기념사진을 찍었고, 국군 최고 1인자인 합참의장과도 기념사진을 찍을 기회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군인들도 전역하기 전까지 군 장성을 단 한 번도 구경하지 못하고 제대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군대를 가지 못했지만 군 장성들과 기념사진을 남기는 존귀한 영광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④목사: 어릴 적 신앙의 뜨거운 열정으로 신학교를 가서 목사가 되고 싶었지만, 집안 사정으로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목사님들도 쉽게 경험하지 못하는 다양한 복음 사역의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국내외 신학교와 목회자 세미나를 인도하게 하신 것입니다. 국내에서도 교회와 시청, 경찰청, 교도소, 군부대, 신학교, 기도원, 목회자 세미나, 전도폭발훈련 등 다양한 사역 현장을 섬기게 하셨고, 해외에 의약품과 구호품 등으로 선교도 하게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제게 불교재단 시설 안에서 20년 가까이 설교를 하도록 하셨습니다. 불교재단 시설 신축 전에는 불당 안과 불상 앞에서 설교를 하게 하셨는데, 전 세계에 부처상 앞에서 설교한 사람은 저밖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외에도 저는 매년 대한민국 국가조찬기도회에 초청되어 매년 참석하고 있습니다. 옛날 시골에서 매일 새벽기도를 후 뒷산에 올라가서 기도하던 자를, 대한민국 국가 지도자들과 함께 기도하는 자리로 주님께서 인도하신 것을 생각하면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현재 5개국어로 전도지를 만들어 미국, 영국,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등 국내외 480개 교회와 선교사들에게 무료로 공급하며, 새 전도지를 더 개발해 무료 보급을 확대할 계획입니다. 전국 어느 교회든 전도지가 필요하면 즉시 무료로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저는 매일 전도를 하고 있을 뿐 아니라 21쪽 분량의 ‘대면 전도지’를 만들었고, 신천지 교인들이 회심하도록 ‘신천지 교인용 전도카드’도 만들어 지참하고 다닙니다.

매월 넷째 주 화요일 오후 1시에는 부산 중구 자갈치교회에서 노숙자와 독거노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오는 8월부터는 필리핀 신학교에서 영상으로 영성훈련을 강의할 예정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살아계신 분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자의 인생을 확실하게 책임져 주실 뿐 아니라 존귀한 길로 인도해 주시고, 주님 나라에서 영원한 상급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수십 년 동안 했다면서, 또 중직자로 지내면서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자신에 대한 주님의 뜻도 모르며, 선한 일도 하지 않고, 매일 복음을 위한 사명감도 없이 매주 예배당만 출입하는 종교인들은 분명 불행한 자일 것입니다.

주님은 감찰하시는 하나님, 결산하시는 하나님,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행한 대로 갚으시겠다고 경고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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