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화해위, 종교인 순교·박해 직권조사 마무리
수도권 기독교인들 92명 포함
총 533명, 타종교인까지 700명
가장 많이 희생된 지역 전라도
영광 염산교회 가장 많은 77명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박선영, 이하 진실화해위원회)는 4월 15일 서울 중구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열린 제105차 위원회에서 ‘한국전쟁 전후 적대세력에 의한 종교인 희생사건’ 중 서울·경기·강원지역 기독교 등 종교인 희생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리고, 종교인 희생사건 직권조사를 마무리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번 직권조사를 통해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희생자 명부와 종교계 기록 등을 검토해 총 600명의 종교인들을 희생자 진실규명을 결정했다. 종교인 집단희생 사건은 인민군 후퇴기에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진실규명된 종교인은 기독교인 533명, 천주교인 64명, 대종교인 3명 등 총 600명이다. 이번 직권조사와는 별도로 1‧2기 진실화해위원회에 사건을 신청해 약 300명의 기독교인들이 진실규명된 바 있다.
진실화해위는 “이번 조사는 한국전쟁 시기 전체 종교인 희생자들을 대상으로 했으나, 불교와 유교 등은 종교인 희생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신청사건 외에 조사를 진행하기 어려웠다”고 밝혔다.
이들은 “한국전쟁 시기 종교인들은 기독교인 혹은 천주교인, 민족지도자 또는 지식인, 지역유지 또는 우익 인사라는 이유로 적대세력에게 개별 혹은 집단으로 희생됐다”고 보고했다.

지역별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곳은 전라도로, 기독교와 천주교 희생자 337명이 진실규명됐다.
전남 영광 염산교회는 단일 교회 단위로 가장 많은 77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 중 희생기록과 참고인 진술로 확인된 기독교인 54명을 진실규명했다.
영광 염산교회 교인들은 1950년 9월 말 수복 시기 국군 환영대회를 개최했다는 등의 이유로 아이부터 노인까지 전 교인의 3분의 2인 77명이 1950년 10월부터 1951년 1월경까지 4개월간 개인별로 또는 가족 단위로 지방 좌익에게 희생됐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염산면 봉남리 설도항 수문 앞에서 돌과 새끼줄에 묶여 바다에 살아 있는 상태로 수장됐다.
전북 김제 만경교회에서는 ‘반공혁명단’을 조직한 청년들이 전주형무소에서 희생됐고, 교인들은 만경지서 우물에서 집단 희생되는 등 총 15명이 지방 좌익에게 희생됐다. 이 중 희생 기록과 참고인 진술로 확인된 기독교인 9명을 진실규명했다.
김제 만경교회 청년들은 우익단체 ‘반공혁명단’을 조직했다가 4명이 좌익세력에게 잡혀 1950년 9월 27일 전주형무소에서 희생됐다. 만경교회 목회자와 교인들은 만경분주소로 끌려갔다, 1950년 9월 27일 만경분주소 우물에서 희생됐다.
가해자들은 교인들을 망치 같은 흉기로 때리고 우물에 넣은 후 무거운 돌로 눌러 놓았다. 당시 만경분주소에서는 기독교인들을 비롯해 총 50여 명이 희생됐다.
충청도 지역에서는 기독교인 125명과 천주교인 20명이 진실규명됐고, 경상도 지역에서는 기독교인 12명이 희생자로 진실규명됐다.
서울·경기·강원 지역에서는 기독교인 92명과 천주교인 11명, 대종교인 3명이 진실규명됐으며, 이 중 납북 피해자가 82명으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에 대해 피해 회복을 위한 입법 촉구, 북한 정권의 사과 촉구, 추모사업 지원 등 후속 조치를 권고했다. 다음은 기독교 희생 사례.

1. 김제 만경교회 김종한 목사와 반공혁명단 희생사건
6.25 발발 후 1950년 7월 20일 인민군이 김제를 점령했고, 우익단체 중심에 있던 기독교인들도 핍박 대상이 됐다. 1950년 9월 11일 신학생 최정렬이 고향으로 돌아와 국군이 수복할 때를 대비해 반공 투쟁을 해야 한다고 교인들에게 ‘반공혁명단’ 가입을 권유하고 가입 신청서를 받아갔다.
다음날 새벽 최정렬을 비롯한 반공혁명단 단원들이 체포됐고, 김종한 목사 등 교회 원로들까지 배후 역할을 의심받아 연행됐다. 반공혁명단이 드러난 이유는 최정렬이 가입시킨 국민학교 동창의 형이 좌익 활동을 해, 반공혁명단을 밀고했기 때문. 반공혁명단 주동 청년들은 전주형무소로 이송됐고, 1950년 9월 27일경 집단 희생됐다.
인민군이 만경에서 후퇴하던 27일 새벽, 만경분주소에 끌려간 사람들은 대장간에서 사용하는 큰 망치로 뒷머리를 맞거나 죽창에 옆구리를 찔린 채 우물 속에 던져졌다. 가해자들은 희생자들의 비명 소리를 감추기 위해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풍물을 쳤다.
마을 사람들은 수복 후에도 분주소에 있던 사람들을 찾지 못하다, 며칠 뒤에야 우물 속을 찾아보았는데, 두 개 우물에는 남자와 여자가 나뉘어 약 50명이 묻혀 있었다. 만경교회 목사와 교인들의 시신도 이 우물에서 발견됐다.

2. 영광 염산교회 교인 집단 희생사건
1950년 9월 29일 영광 읍내에 국군과 유엔군이 들어와 진주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영광에서는 염산교회 청년들, 집사들이 중심이 되어 환영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영광읍에서의 대대적 환영대회 소식은 영광군 전역에 퍼졌으나 군청에 태극기만 게양됐을 뿐, 영광군 어느 곳도 완전히 수복된 곳은 없었다.
이에 영광군 염산면에서는 생산유격대가 나서 환영대회 참석자에 대한 보복이 이뤄졌다. 염산교회 전 교인의 3분의 2인 77명이 1950년 10월부터 1월경까지 4개월간 개인별 또는 가족 단위로 지방 좌익에게 끌려가 대부분 교회 근처 설도항 수문 앞에서 돌멩이와 새끼줄에 묶여 바닷물에 산 채로 수장됐다.
염산교회 노병재 집사와 그 가족들은 염산교회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닷가 둑방 옆 설도항 수문으로 끌려가 차례로 수문 밑으로 던져졌다. 염산교회 김만호 장로와 박귀덕 권사의 딸, 옥자·신자·금자·미자 4자매도 설도항 수문 위에서 다 같이 희생되었다. 좌익들은 칼로 이들의 목을 내리쳐 살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