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한 선교사들, 당시 조선 사회 얼마나 변화시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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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선교운동과 내한 선교사들 3] 근대사회 형성 동기·요인·힘

19세기 말 선교사 기독교 전파
신앙, 한국 개화 동력이자 주체
‘하나의 새로운 사회’ 형성시켜
복음 전하자, 자연스럽게 변화

▲『KOREA MISSION』(METHODIST EPISCOPAL CHURCH, 1910)에 수록된 1910년대 선혜창 장시로 추정되는 서울의 시장 풍경이다. ⓒ서울역사박물관

▲『KOREA MISSION』(METHODIST EPISCOPAL CHURCH, 1910)에 수록된 1910년대 선혜창 장시로 추정되는 서울의 시장 풍경이다. ⓒ서울역사박물관

1884년 9월 알렌 의사 이후 1985년까지 100년간 내한한 선교사 총 수는 약 3천여 명으로 파악된다(기독교역사연구소 조사). 내한 선교사들은 한국 사회와 역사, 근대문화, 교육, 의료, 예술, 체육 등 각 분야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위대한 선교사학자 구스타프 베르넥(Gustav Warneck, 1834-1910)은 “서양 선교사들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서구 문화의 전파자(Kulturträtger) 역할을 했고, 피선교국 사회문화 변화에 영향을 줬다”고 말했는데, 이는 한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기독교는 한국 근대사회 형성과 변화의 주된 동기(motive)이자 요인(cause)이었고 힘(power)이었다. 19세기 말 선교사들에 의해 전파된 기독교 신앙은 한국 개화(開化)의 동력이자 주체였고, 근대교육과 의료, 민주의식, 민족운동과 독립운동, 한글의 보급과 문화운동, 그리고 일상생활 전반에 영향을 끼쳤다.

물론 기독교가 사회개혁이나 사회변화를 위한 조직체이거나 그것이 일차적인 사명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은 자연스럽게 한 사회를 변화시켜 갔다. 영국 존 스토트(John Stott, 1921-2011)는 에베소서 주석에서 “에베소서는 개인과 가정, 결혼과 사회, 그리고 국가에 대하여 새로운 가치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책 제목을 ‘하나의 새로운 사회(A New Society)’라고 명명했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경우와 동일했다.

기독교는 한국에서 이전과 다른 ‘하나의 새로운 사회’를 지향했다. 이런 점은 우리나라의 경우만은 아니었다. 기독교는 서구사회 문화 형성의 뿌리였다. 그래서 크리스토퍼 도슨(Christopher Dawson, 1889-1970)은 기독교적 가치가 서구 문화 형성의 모체였다고 지적했다.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아펜젤러에 의해 설립된 배재학당, 1890년경.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아펜젤러에 의해 설립된 배재학당, 1890년경.

교육:
신식교육과 교육 대중화 이뤄져
인권과 자유, 민주와 평등, 복지,
개인주의·민주의식 등 가치 배워

내한 선교사들이 한국 사회 변화를 가져온 가장 중요한 방편은 교육과 의료였다. 1910년 당시 기독교계 사립학교는 751개교로 알려져 있는데, 서울의 배재학당(1885)을 시작으로 이화(1886), 경신(1886), 정신(1887), 평양 광성(1894), 부산 일신(1895), 마산 창신(1906), 평양 숭실(1897), 재령 명신(1898), 전주 신흥(1900)과 기전(1900), 대구 신명(1903)과 계성(1906), 선천 신성(1906), 함흥 영생(1907), 광주 숭일(1908), 순천 매산(1913), 서울 연희(1915) 등 각처에 학교가 설립되면서 서양 문화가 소개되고 신식교육과 교육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또 인권, 자유, 민주, 평등, 복지, 개인주의, 민주의식 등 근대적 가치를 배우게 됐다.

▲1889년경 보구여관 모습. ⓒ감리회

▲1889년경 보구여관 모습. ⓒ감리회

의료:
미신이나 민간 의존하던 의료
광혜원 등 설립, 현대 의학으로
1913년까지 38개 병원 설립돼
해방 전까지 의료선교사 300명

그런가 하면, 호러스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의 입국으로 서양 의술이 소개되고 1885년 4월 10일 광혜원이 설립된 후, 스크랜튼(Mary Scranton, 1832-1909)에 의해 시병원(1885)이, 메타 하워드(Dr. Meta Howard, 1858-1932)에 의해 정동에 여성만을 위한 보구여관(普救女館)이 세워진 후 각처에 병원이 설립되면서, 미신적이거나 민간 의료에 의존하던 우리 사회에 현대 의학이 도입됐다.

의료활동은 각 선교부별로 전개돼 1913년까지 전국적으로 38개 병원이, 3개 처에 진료소가 각각 설립됐다. 미국 북장로교는 강계, 선천, 평양, 제령, 서울, 청주, 안동, 대구, 부산 등 9곳에 병원을, 남장로교는 군산, 전주, 목포, 광주, 순천에 5개 병원을, 캐나다장로교는 성진, 함흥에, 호주장로교는 진주에, 북감리회는 연변, 평양, 해주, 원주, 공주에 5개 병원을, 남감리회는 원산, 송도, 춘천에 병원을 설립하고 운영하고 있었다.

해방 이전까지 내한한 의료선교사는 300여 명으로 파악되는데, 이들의 헌신적 노력으로 한국에 서양 의술이 소개되고 의학 발전을 도모하게 된다. 즉 우리나라는 의료 선교사들을 통해 서양 의술에 눈을 뜨게 됐고, 구습과 미신적 굴레에서 해방되기 시작했다. 교육과 의료는 개화의 방편이었다.

▲숭례문 문루에서 포착한 남대문로 일대 전경 사진이다. 오른쪽 위 건물이 상동교회(尙洞敎會)이다. 『KOREA MISSION』(METHODIST EPISCOPAL CHURCH, 1910)에 수록됐다. ⓒ서울역사박물관

▲숭례문 문루에서 포착한 남대문로 일대 전경 사진이다. 오른쪽 위 건물이 상동교회(尙洞敎會)이다. 『KOREA MISSION』(METHODIST EPISCOPAL CHURCH, 1910)에 수록됐다. ⓒ서울역사박물관

교육과 의료, 구습과 미신 해방
사물 과학적 인식 안목 길러줘
남여평등, 女권 신장, 인권 관심
혼례, 일부다처 중혼 제도 타파
조혼 악습 비윤리성도 깨우쳐
허례허식·불합리 장례도 개혁

또 민주의식을 함양하고, 사물을 과학적으로 인식하는 안목을 길러줬다. 기독교 복음은 자연스럽게 남여평등과 여(女)권 신장을 가져왔고,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 서양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주재하면서 기독교 윤리관과 서구적 합리주의에 기초해 우리 사회의 폐습이나 문제점들을 보게 되었고, 이의 타파를 권면했다.

여기서 기독교 전파 이후 한국인 일상에 영향을 준 사회 변화의 몇 가지 측면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는 혼례와 장례의 변화였다. 내한 선교사들이 관찰한 한국 사회의 한 가지 큰 문제는 첩을 두는 복혼(複婚) 혹은 중혼(重婚) 제도였다. 따라서 중혼한 이들이 교회 직분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심각한 주제였다.

▲1911년 혼례 가마 행렬 모습. 『朝鮮風景人俗寫眞帖』(日韓書房·日之出商行·海市商會, 1911)에 수록됐다. ⓒ서울역사박물관

▲1911년 혼례 가마 행렬 모습. 『朝鮮風景人俗寫眞帖』(日韓書房·日之出商行·海市商會, 1911)에 수록됐다. ⓒ서울역사박물관

이런 점에 대한 해답이 윌리엄 베어드(William Baird, 1862-1931)가 1896년 쓴 ‘기독교회는 일부다처주의자들을 용납할 것인가(Should Polygamists be admitted to the Christian church)?’였다. 이 글은 장로교 선교공의회 최초의 연구보고서였다. 이 글을 통해 베어드는 기독교 입장에서 조혼(早婚)의 악습과 중혼(重婚)의 비윤리성을 깨우쳐 주었다.

이에 문제를 깨닫게 된 감리교 동대문교회 노병선 목사는 『조선그리스도인 회보』에 “우리나라에서 혼인하는 데 큰 폐단이 두 가지 있으니, 첫째는 일직 혼인하는 것이라. … 어찌 하자고 십사, 오세도 못된 어린 아헤를 짝을 지어주니… 자식을 죽이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요, 둘째 폐단은 혼인을 부모가 작정하여 주는 것이라. … 서로 만난 후에 합당치 아니한즉 잔약한 여인은 여간 불합하더라도 그 남편을 따라가지마는 사나이 놈은 제 주먹 힘이 든든한 것만 믿고 사태를 돌아보지 않고 그 아내를 욱닥이며 두다리며 사불여의 즉 본처를 내어 쫓고 첩을 얻는다. 심지어 살육이 난다”라고 썼다.

기독교는 장례의 폐습도 일깨워 주었다. 한국의 장례는 이능화(李能和)의 지적대로 지나치게 번잡하고 복잡했는데(厚葬成風), 허례허식적이고 불합리한 일이 적지 않았다. 허례허식적 의식을 고쳐 장례의 참뜻을 살려보려는 교회의 시도가 제사폐지론(祭祀廢止論)과 맞물려 오해를 야기한 일도 없지 않았으나, 기독교적 장례 의식는 점차 수용되어갔다.

▲1919년 고종 황제 대여 행렬과 이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모습. ⓒ서울역사박물관

▲1919년 고종 황제 대여 행렬과 이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모습. ⓒ서울역사박물관

구습과 미신 타파에도 앞장서
우상이나 미신에 매우 부정적
비과학적 토착 문화들 개선해

둘째는 구습과 미신 타파였다. 기독교가 한국에서 직면했던 또 한 가지 문제는 한국의 토착 문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였다. 그것은 척결의 대상인가, 아니면 개선 가능한 이방 문화인가? 아니면 복음 안에 수용, 수렴될 수 있는 일반은총의 산물인가?

일반적으로 선교사들은 문명개화론에 기초해 토착 문화를 이해했다. 선교사들의 1차 목표는 개종자를 얻고 교회를 설립해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는 것이지만, 서구 문화의 전파도 중요한 가치로 인정했다. 한국 토착 문화나 종교, 신념 체계에 대해 그 고유성을 인정하고 긍정적 평가를 한 이도 없지 않았으나, 우상이나 미신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서구적 합리주의나 과학적 지식에서 볼 때 받아들일 수 없는 비과학이었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한국 사회 일상이었던 미신을 타파하고 합리적 일상을 구가하게 한 일은 또 하나의 사회 변화였다. 이 점에 특별히 기여한 이가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였다. 실제로 기독교회는 미신 타파에 앞장섰고, 기독교회에 입교한 후 성황당 같은 미신적 신앙을 타파하고 집안의 복주나 토주, 삼신항아리를 불사르는 일들을 전개했다. <계속>

이상규 박사
백석대학교 석좌교수, 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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