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록, 한 점의 그림] 성다솜, 식물 공동체와 모자이크 세상
창조주 영광 풍성함 느낄 다양성
서로 얽히고 기댄 관계의 존재론
알려진 것들 소중히 여기고 보호
예술 통해, 좀 더 나은 존재 성장
벚꽃이 필 무렵이면 성다솜의 작품을 떠올리게 된다. 이맘때면 겨우내 동토 속에서 움츠렸던 것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기를 되찾는 ‘식물들의 함성’을 담은 그의 작품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은 초록, 파랑, 보라, 분홍, 청록, 하늘색 등 여러 색상들이 술렁이며 봄 잔치를 벌인다.
성다솜 작품에 소환되는 이미지는 각양각색의 식물들이다. 식물들과의 만남은 설레고 기분 좋은 순간이다. 국내외를 여행할 때면 꼭 식물원을 방문하는데, 거기서 온갖 진귀한 식물들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스케치하고 스튜디오에 돌아와 작업에 착수한다.
물론 작가가 스케치한 모든 식물 이미지가 작품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일단 몇 점의 드로잉을 고른 후 단순화와 재구성 과정을 거치는데, 이 과정에서 원래 식물의 이미지는 과감히 생략되고 새로운 이미지로 탄생된다.
몇 점을 제외하고 상당수 작품은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넘나드는 ‘회화적 릴리프’로 구성돼 있다. 전체적 구조가 분리되어 있으면서 하나의 덩어리이며, 각각의 잎은 개별적이면서도 유기체로 존재한다.
처음에는 패널로 시작했다 몇 년 전부터는 플라스틱의 일종인 포맥스를 사용하고 있는데 드로잉, 재단, 사포질, 하도작업, 채색, 그라데이션의 과정을 밟아 최종적으로 풍부한 암시성을 지닌 유기적 이미지가 탄생하게 된다.
작가는 왜 그토록 많은 모티브 중에서도 식물을 다루게 되었을까? 작가에 의하면 작업실에서 식물들을 기르다, 차츰 식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식물들이 계절마다 변하며 돌보는 만큼 기쁨을 안겨주고, 여기에 작가의 상상력이 보태져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까지 주제의 범위를 넓히게 되었다.
식물 공동체는 단지 식물을 그린 게 아니라, 서로 연결된 생명체로서의 관계를 암시한다. 물론 인간 사회는 식물들과 많이 다르다. 인간 사회를 식물과 견주는 것은 호사란상(胡思乱想)의 발상에 가깝지만, 서로 돕고 협력하기보다는 때로는 갈등하며 대립하면서 위기에 빠트린다. 지구에서 각종 분규와 전쟁이 끝나지 않는 것은 지금도 인류의 ‘고질적인 재앙’이 진행 중임을 알려준다.
반면 식물의 세계는 주어진 질서에 따르면서 상호 조화를 도모한다. 이런 측면은 작가를 매료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가 식물원을 방문했을 때 아열대 지역에서 온 것이든 온대, 냉대 지역에서 온 것이든, 태생은 다르나 공동체를 이루는 모습에 눈길이 갔다고 한다. 그리하여 작가는 “다름이 곧 아름다움이고 다양성은 조화의 원천이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우리가 놓치지 쉬운 것을 성다솜은 식물의 은유를 통해 알려준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생명은 창조질서 속에서 보존되고 통일성 속에서 다양성을 나타낼 수 있게 설계돼 있다. 통일성만 있고 다양성이 없다면 세상은 황량하게 되지만, 다양성만 있고 통일성이 부재하면 분규와 혼란, 무질서를 막기 어렵다. 그런 면에서 다양성과 통일성의 관계는 상호의존적이다.
‘다양성’은 전에 좋은 의미로 사용됐지만, DEI를 앞세운 문화막시즘 이후에는 이 말이 지닌 뉘앙스 때문에 편치 않은 용어가 되었다. ‘다양성’이란 명목으로 문화 속에 야금야금 침투하여 죄의 형태를 증식시키니 말이다.
이 때문에 ‘다양성’을 누구보다 환영해야 할 그리스도인이 소극적이거나 경계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같은 말이라도 어떤 의도에서 이 용어를 사용했는지 분별할 필요가 있다. 성다솜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다양성’은 창조주의 영광의 풍성함을 느껴볼 수 있는 표지가 아닐까.
서로 얽히고 기대 있는 관계의 존재론은 그의 작품을 볼 때 놓칠 수 없는 중핵적 부분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식물들은 밝고 명랑한 표정을 짓는다. 포맥스 위에 채색된 형형색색의 칼라는 자신의 기쁨과 행복을 마음껏 분출하고 있는 듯하다.
공존의 덕목을 알고 거기서 만족을 찾기에, 기쁨과 즐거움은 그로 인해 덤으로 주어진 듯하다. 그러한 기쁨과 즐거움은 보는 사람까지 동일한 감정에 감염시키는 파급력을 갖고 있는 듯하다.
웬들 베리(Wendell Berry)는 ‘삶에 봉사하는 예술’에 대해 언급하면서 존경과 충성스러움, 이웃 간의 정, 충직함, 사랑과 기쁨과 같은 미덕을 존중할 것을, 그러한 예술은 우리의 피조성을 본래대로 지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구호로 그치지 않으려면 예술가는 추상적 수사에 머무르지 말고 “알려진 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보호하며, 소중히 함으로써만 알 수 있는 것들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Wendell Berry, Life is a Miracle, 박경미 역, 『삶은 기적이다』, 녹색평론사, 2006, 199쪽).”
세계 안의 피조물들을 보살피려면 개념적으로만이 아니라 상상력에 찬 마음으로도 그것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웬들 베리는 구체적이며 의미 관련성이 있으며 일상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언어를 제안한다.
성다솜이 구사하는 식물 이미지는 그저 여러 이미지 중 하나가 아니라 그의 개인 경험에서 비롯되었고, 그에게는 꽤나 소중한 것들이다. 그가 이런 식물 이미지를 애용하는 것은 그야말로 “알려진 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보호”하려는 의도도 깔려 있다.
그것에 다가가는 방식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의 작업은 ‘관찰’에 의존하기보다 ‘친근감’을 바탕으로 한다. ‘관찰’은 분석을 필요로 하는데 비해, ‘친근감’은 대상과의 거리를 좁힌다. 주어진 것들을 당연한 것이 아니라 가치 있게 받아들일 때 그런 감정이 생긴다.
친근감을 갖지 못하는 언어는 단테나 존 번연을 포기하면서 지성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잘 아는 대상에 애정을 싣는 것은 우리의 경험을 확대시키고 감성을 넘치게 만든다. 물론 그의 식물 이미지가 꼭 생태 문제에만 국한되진 않을 것이다. 그것의 함의는 우리 예상보다 좀더 멀리 나간다.
인간 사회는 모자이크와 같다. 다른 것끼리 어울려 한편의 작품을 만드는 공교로운 과정이다. 타자를 받아들이면서, 사회는 그만큼 다채로워지고 온전해진다. 그러려면 개체 하나하나의 특성을 존중하고 그것이 전체 그림을 완성하는 데 빠져서는 안될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 점을 조지 엘리엇(Jeorge Eliot)은 역설적으로 “사람들은 가장 가까운 이웃을 위해 보여줄 수 있는 용기를 제외한 모든 종류의 용기를 찬미한다(David Brooks, The Road to Character, 김희정 역, 『인간의 품격』, 부키, 2015, 330쪽)”고 표현했다. 이웃과의 친밀감 내지 관계의 수용을 성다솜은 평범한 식물에서 발견했고, 이 점을 감상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몇 년 전 차별과 고통으로 얼룩진 한센인들의 삶의 터전을 찾아 환대와 축복의 공간으로 바꾸려는 시도 또한 이런 흐름 가운데 있다. 웬들 베리가 말한 ‘존경’, ‘이웃의 정’, ‘사랑’, ‘기쁨’과 같은 가치가 없었다면, 이런 작업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공존과 돌봄의 철학’을 표방하는 작가에게서 우리는 희망찬 미래의 전망을 가진다. 식물을 주제로 삼은 것 자체가 생태학적으로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관계적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 섬김을 실천할 때 삶이 더욱 부유해진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성다솜은 사회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라 예술을 통해 우리 사회가 좀더 나은 단계로 성장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원하는 적극적 사고의 소유자이다. 함께 살아가는 존재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바탕으로 하는 성다솜의 작품 메시지가 잔잔한 울림을 준다.
서성록 명예교수(안동대 미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