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 값없는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 그는 틀렸다.
<동아일보 8월 30일 개재>"왜 종교안에, 종교간에 폭력성이 잠재하고 있는가. ‘자기 붓대롱으로 본 하늘만이 진짜요, 자기만이 하늘을 모두 본 자’라고 우기는 배타적 독선 때문이다. 종교의 시작과 본래 모습은 ‘막히지 않고 흐르는 물과 바람같은 것’인데 이것이 역사를 거치면서 고인 물과 탁한 공기가 되었다.
종교 경전에 나오는 ‘거룩한 전쟁’이니 ‘지하드’(聖戰)니 하는 것은 받아 들여서는 안되는 이데올로기다. 종교의 기본원리는 ‘자기부정을통한 새로운 존재에로의 재 탄생’이다. 이 과정이 철저하게 이뤄지지 않은 종교인은 미움, 봉사, 평화, 연민 대신 지배욕망으로 가득한 ‘공격적 종교인’이 된다.
어떻게 해야 평화, 자유, 평등, 상호 성숙을 이뤄가는 종교인들이 될 수 있는가? 모든 것은 절대가 아니라 상대적임을 받아 들여야 한다. 나는이것을 ‘해석학적 눈뜨임, 참회’라고 말하고 싶다. 사람의 모든 지식과 이해는 제한되고 굴절되기 쉬우므로 ‘상대적’이다. 그것이 종교적 진리일지라도 ‘상대적 진리체험’임을 알아야 한다. 부분적으로 아는, 언어나 논리의 세계안에서는 모호성에 휩싸인다. 진리라는 것도 언제나 구체적인 ‘역사적 문화적 언어적 틀’에 담겨 이해되고 표현되어 왔다.
이제 우리는 어느 종교가 더 좋은 진리 ‘체계’를 가졌는가를 따지는 ‘정교(正敎) 경쟁’이 아니라 어느 종교가 더 많은 자유, 정의, 평화, 봉사 운동에 복무하는 가를 따지는 ‘정행(正行) 경쟁’이 되야 한다. 좋은 나무는 열매로서 안다. 종교의 진면목은 교리, 제도, 신학, 직제 등이아니라 ‘지금 여기(now-here)’에서 ‘자유와 사랑 안에서 삶 그 자체’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이해되고 이해된 만큼 사랑하고 협동한다. 이웃 종교에 대한 무지와 편견은 종교간의 갈등과 폭력의 중요한 원인이다. 종교는 물신숭배시대, 성장신화 찬양시대속에서 시류에 편승하지말고 인간성의 자기정화, 고양, 승화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꼭 1년전 이맘 때 나는 뉴욕 법회 때문에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 있었다. 뉴욕 JFK공항에 다다를 즈음, ‘이 비행기는 곧 공항에 내린다.
공항의 날씨는 맑다’는 기장의 안내방송이 나오고 10여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공항 보안문제 때문에 착륙이 힘들다는 기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비행기는 항로를 바꿔 미니애폴리스로 내렸다. 나는 다른 탑승객들과 공항 호텔에서 3일간이나 머물면서 9.11테러 소식을 들었다.
뉴욕의 월드 트레이드 센터를 공격한 사람들은 한쪽 입장에서 보면 살인자이지만 다른 한쪽 입장에서 보면 순교자다. 조시 부시 대통령이나 오사마 빈 라덴 모두 ‘신이 우리를 도울 것이다’고 이야기했다. 이때 말하는 신은 무엇인가. 우리는 각자 우리들 나름대로의 신이 있다. 그리하여 내가 믿는 신만이 옳고 남이 믿는 신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종교적 배타성이다.
내 믿음에만 집착하고 남의 믿음을 인정하지 않은 것 자체가 종교적 폭력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왕국’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자비와 같다.
예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다. 도대체 그 진리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을까. 가톨릭 신자였던 나는 그런의문을 갖고 영적 방황을 했으며 책도 수없이 읽었다. 그리고 마침내 참선 수행을 통해 기독교에서 말하는 진리나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의 저자 현각스님 (미국)
과연 현각스님은 진리를 아는가?
진리를 상대적이라고 주장하는 현각스님의 주장을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 이것은 우리 스스로가 노력해서 쟁취하는 일종의 고행이 아니다. 바울은 이 구원에 관하여 오직 믿음으로만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믿음이 고행으로, 우리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던 것인가?
사실상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와 철학, 또 사상이 있다. 그러나 그 무엇도 인간을 허망함 속에서 건져내지 못하였고, 모두 각자 나름대로의 특성을 가지고 현실 세계에 '적응'해 가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진리일까? 변하는 진리, 상대적인 진리. 그렇다면 절대적인 것은 무엇인가? 인간은 그 절대적인 진리를 찾아 끊임없이 노력했으며, 결국 찾지 못했을 때 회의적인 모습으로 자기 안에 갖히는 것이 아니였던가?
진정 인간이 찾는 진리는 무엇인가? 인간은 도대체 무엇을 그렇게 끊임없이 찾아 헤메이고 있는가? 답은 사랑이다. 그것도 영원한 사랑이다. 기독교는 바로 이 진리를 우리에게 말해준다.
가톨릭 신자로서 그런 의문을 갖고 영적 방황을 했으며 책도 수없이 읽었다는 현각스님은 그런 면에서 불행한 사람이다. 행복이, 사랑이 책 속에서 찾아질 수 있던 것인가? 진리를 '깨닫는 것'과 '삶으로 사는 것'은 엄연히 틀린 것이다.
"종교간에 폭력성이 잠재하고 있는 이유는 '자기만이 하늘을 모두 본 자’라고 우기는 배타적 독선 때문이다"라고 주장하는 현각 스님의 주장에 대해 이전 가톨릭 신자로서 진정 하나님 사랑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본 일이 있는지 묻고 싶다.
아이도 어머니의 사랑을 알아보는데, 과연 그는 진정 하나님의 사랑을 '본'적이 있었던가? 진정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받은 그 사랑을 계속해서 소중히 간직하며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이 그의 안에는 있었던가?
배타적 독선. 객관적이라고 보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사람을 판단할 때는 그 사람의 '삶'을 보아야 한다. 그의 이름, 그의 학벌, 그의 족보 등으로는 그 사람의 부분을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그를 다 안다고는 할 수 없다.
'무엇이 어떻다'라고 비판하기 이전에 비판자는 그 비판 대상을 어느정도 알아야 할 책임이 있다. 적어도 틀리게 알고 있지는 말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에 대해 '배타적 독선'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그는 성급했다.
이성이 이해할 수 있는 세계가 있다. 이성으로는 신이 있다는 차원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세계, 기독교가 말하는 믿음과 사랑의 차원은 절대 이해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예수 앞에 고꾸라졌던 것이다. 나를 괴롭히던자, 오히려 핍박하고 잡아죽이려는 자를 용서하고 품은 그 사랑을 바울은 머리로 '안' 것이 아니라 '받아들인 것'이다.
그 사랑은 어떠한 사랑인가? 수도를 해서 얻어지는 것이 사랑인가? 바울이 수도를 해서 그 진리를 얻고 사랑을 얻었다면 성경의 절반은 새로 씌여졌어야 할 것이다.
바울도 나름대로 성경을 잘 알고 풀이할 줄 아는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원수같이 악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용서하시고 그를 받아들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하나님은 태초에 우리를 지을 때 가지셨던 그 값없는 사랑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우리 죄를 대신 지고 가신 것처럼 바로 그 사랑으로 우리를 받으시고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것이다.
그 사랑이 우리의 이성으로, 세상적인 지식으로 판단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이 사랑의 진리는 오히려 어리석다고 손가락질 받고, 세상의 핍박과 환란을 겪는 진리였다.
그러나 그렇게 세상사람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는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예수님을 통해 증거되고, 또 바울과 같은 사도들의 '삶'을 통해 진리임이 증거되지 않았던가!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왕국’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 자비와 같다"라는 현각스님의 주장은 엄격히, 그리고 분명히 말해서 틀렸다. 비슷해 보일 수 있으나, 동질이 아닌 것이다.
사랑의 세계는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세계가 결코 아님은 앞에서 이야기했다.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으며, 그 이상 차원의 세계는 오로지 믿음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의 사랑으로 말미암은 구원, 그 진리는 내 노력과 공로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성을 넘어서는 믿음과 사랑의 세계는 내 참선 수행이 아닌, 사랑이신 하나님의 값없는 은총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 세계를 진정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알게 된다면, "마침내 참선 수행을 통해 기독교에서 말하는 진리나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라는 말은 결코 나오지 않으리라.
무한한 절대자에게로부터 오는 값없는 사랑으로 말미암은 구원과 유한하고 절대적일 수 없는 인간이 수행을 통해 얻고자 하는 해탈자비.
이 두가지 중 어느 것이 확실한 진리로 이를 수 있는 길일런지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이 문자적으로 해석을 한다해도 바로 판단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