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진 허리를 통해 열왕(列王)을 배출한 사람
"야곱"은 실제적인 이스라엘의 조상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이 야곱의 열두 아들을 그 조상으로 하는 부족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곧 "야곱"의 개명(改名)이라고까지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야곱"은 구약성서의 인물들 중에서 신의 축복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가장 심각한 신학적 쟁점이 바로 여기서 제기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야곱"은 그의 형 "에서"에 비하면, 인격적으로 훌륭하다고 볼만한 점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도덕적 평가만 가지고서 말한다고 하더라도, "야곱"은 축복은 커녕 가혹한 저주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야곱이 신의 축복을 독차지하다니!
그는 사냥꾼의 약점을 노리고 있다가, 기회가 왔을 때, 가차없이 형의 장자권을 빼앗아 가버린 간교한 자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연로하신 아버지의 약점을 이용하여서까지 형에게 주어질 축복을 가로채간, 이른 바, 사형(死刑)에 처할 만한 반 도덕적인 죄인(cf. 출 21:15,17)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야곱이 선민(選民)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면, 여기에는 우리가 풀어야 할 중요한 신학적 문제가 개재되어 있음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즉 야곱이 이스라엘로 될 수 있는 그 요인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 풀어야 할 문제라 하겠다.
성서의 야곱 이야기(창 25-35장)는 이 물음에 대하여 대답하기를 회피하거나, 아니면, 종교 교조로서(창 25:23) 그 대답을 합법적으로 왜곡(歪曲)시키거나 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솔하게 야곱의 생애를 있는 그대로 소개하고 그가 그 벗기 어려운 인생허물을 과연 어떻게 벗어 던질 수 있었으며 또한 어떻게 감히 그가 위대한 이스라엘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던가 하는 것을 매우 극적인 화법으로 진솔하게 설명해 주고 있었다. 그 설명은 다음의 네가지 사건 보도를 연결시킴으로 완벽하게 제시되었다고 하겠다.
(1) 그 첫째는 버림받은 땅 "루스"를 "벧엘"로 바꾼 사건의 보도이다(창 28:10-22). "루스"라고 이름하는 잊혀진 옛 성읍에서 야곱은 두 가지의 상반된 이중적 성격의 경험을 가졌다. 그 하나는 나그네 따위는 아무도 영접해 주는 자가 없는 그런 희망없는 곳에서 노숙(露宿)하며 밤을 지새워야 했을 때, 그 밤을 보낼만한 "한 장소"를 찾는 일이었고, 그 다른 하나는 그러한 외면당한 그 곳으로부터 오히려 한 거룩한 곳, "한 성지(聖地)"를 찾는 일이었다. 야곱의 궁극적 관심은 후자였다.
즉 야곱은 노숙할 곳을 찾자마자 곧 그 곳을 통하여 감히 하나의 "비젼"(vision)을 열려고 몸부림쳤던 것이다. 말하자면, 땅으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그리고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오는 "램프"(ramp)를 이 곳 외면된 고통의 땅, "루스"의 한 벌판에 건축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마침내, 야곱은 루스를 벧엘로 재건(再建)하는데 성공하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램프를 오르락 내리락 하는 신비한 사건을 보게 된 것이다. 실로, 버림받은 땅을 일구어 하늘로 이어지는 램프?만드는 것, 이것이 야곱이 이스라엘로 도약하는 그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위대한 도약은 이와 같이 버림받은 현장을 새로운 도약의 시작점으로 변화시키는데서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2) 그 둘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서 깨뜨림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을 압도하였던 한 사건의 보도이다(창 32:24-32). 야곱은 그 인생의 험난한 모든 과정을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금의환향(錦衣還鄕)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고향 문턱인 "얍복" 나루터에서 자신의 과거를 철저한 회개(悔改)로써 청산(淸算)하는 일을 단행한다. 성서기자는 이것을 "하나님과의 씨름"이라는 말로 은유화(隱喩化) 하였다.
"하나님과의 씨름(!)"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처음부터 게임이 안되는 일이었다. 하나님과 얼굴로만 대면하는 것도 그 자체가 "자기를 죽이는일"(출 33:20)이었다. 과연, 야곱은 하나님의 일격을 받고 허벅지(환도뼈)가 깨어져 절룸발이가 되었다. 여기서의 "허벅지"(환도뼈)는 성기(性器)가 있는 부분으로서, 즉 자손번성의 축복을 구현할 자리로서, 이 허리(허벅지)의 붕괴는 곧 생산능력의 상실을 의미한다. 야곱에게 내린 모든 후손 축복이 상실되었다는 것, 즉 모든 것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성서기자는 여기서 허벅지가 붕괴되어 무너진 야곱의 손을 들어 주며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즉 하나님 앞에서 무너지므로 하나님을 이기는 특수한 경험을 한 것이다. 일종, 십자가만이 부활을 창조한다는 구원의 역설적 진리를 터득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완성에 도달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다리를 절며 하나님 앞을 지나가는 그 야곱 앞에 희망의 태양이 떠 올랐을 뿐(창 32:31)이었다.
(3) 그 셋째는 원수된 자와의 근본적인 화해를 통하여 자기변화를 경험한 한 사건에 대한 보도였다(창 33:1-20). 얍복 나루터에서의 자기붕괴를 경험한 야곱은 자기변화의 새 인간이 된다. 즉 야곱은 평생을 두고 원수되었던 형 "에서"(에돔 민족의 조상)와의 해후(邂逅)의 순간에, 그 원수되었던 형을 향하여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옵니다"(창 33:10)라고 고백하기에 이른 것이다. 원수의 얼굴로부터 하나님의 얼굴을 발견하는 인간변화! 이 인간 변화의 경험이 곧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는 경험을 본 궤도에 진입하게 하는 결정적 요인이었다.
(4) 이 모든 과정의 결론적 사건은 변화를 경험한 자의 마지막 결단행위와 이에 하나님의 판결선언으로 마무리된다(창 35:1-18). 모든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고향 땅에 돌아 온 야곱(창 33:18-20)은 그 가지고 있는 과거유산을 모두 세겜 근처 상수리 나무 아래에 매장하고(!) "벧엘"로 올라 갔다. 거기서 그는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리라는 것과 그리고 깨어져 무너진 그의 허리로부터(생산 능력이 없는 그 허리로부터) 장차 열왕(列王)이 태어날 것이라는 하나님의 축복사를 듣는다.
남의 뒷 발꿈치나 잡는 간교한 인간 야곱이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기는 "이스라엘"이 된 것은 예정론적 수순(창 25:23)에 따른 결과는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옛 인간성이 모두 철퇴를 맞아 무너지는 회개를 경험함으로서, 그 회개(깨어진 심령, 시 51:17)를 통하여 비로소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되는 희망("해가 돋았고" 창 32:31)을 창출해 낼 수 있었던 그의 피나는 자기정화(自己淨化) 과정의 한 결과에 불과하였던 것이라고 하겠다.
이것을 성서적 은유(隱喩: metaphor)로 집약하여 표현한 성서구절이 바로 "나는 전능(全能)한 하나님이다.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열왕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라고 한 하나님의 축복사(祝福辭)이다. 이 "허리(야레크)"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파괴된 "야곱의 허리"(예렉 야아콥; 창 33:25,31-32)를 가리킨다.
동시에 야곱과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 장차 있을 출애굽 구원역사를 주도할 이스라엘 해방의 주체 세력인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70인"(출 1:5)을 말할 때의 그 "허리"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스라엘 형성을 전적으로 "깨어진 야곱의 허리의 신비하고도 전능한 출산력"에 의한 것일 뿐이라고 증언하는 것이 바로 다름 아닌 성서의 중심 메시지이다.
김이곤 교수(한신대 신학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