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나라 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는 '찬송가'라기 보단, 일종의 복음가(Gospel song)나 성가(聖歌, a sacred song)에 가깝다는 것이다. 모든 찬송가의 가사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나' 위주로 되어 있는 인본주의적인 기독교 노래들이다. 즉 성삼위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내용이 아니라 "내가 ∼을 어떻게 하겠다" 라는 '나(인간)' 중심적인 기독교 노래들이라는 점이다.
어거스틴(354-430)은 찬송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찬송가란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확실한 내용으로 되어 있는 것이 찬송가이다. 만약 그 노래 가사에 찬양의 내용은 있으되 하나님을 찬양하는 구체적인 것이 없으면 그것은 찬송가가 아니다. 또 찬양의 내용도 있고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찬양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노래로 불려지지 않는다면 찬송가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한 노래가 찬송가가 될 수 있기 위해서는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첫째 찬양하는 것이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되어야 하고, 다음은 노래 불려져야만 한다."
어거스틴이 내린 찬송가에 대한 이러한 정의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에 실려 있는 모든 노래를 비판해 볼 때 금번 21C 찬송가가 얼마나 많은 곡들이 범주 안에 들어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찬양하지 아니하고 개인의 신앙고백이라든가 또는 개인의 놀라운 구원의 체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노래하는 것, 또는 교인들을 교육하기 위한 의도로 쓰여진 노래, 그리고 전도와 선교를 위한 노래는 어거스틴의 정의에 의하면 찬송가라고 볼 수 없다는 말이다.
회중 찬송가란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모였을 때 사용되어지는 노래로 '하나님 찬양가'이다. 즉 '하나님 찬양가'란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만든 노래에 대한 준말로서 사용되어질 때, 진정한 찬송가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에서 사용되어지는 음악은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 인간을 위한 것인지를 구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예배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목적의 위한 것인지를 구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교회에서 사용되어지는 모든 음악을 가리켜 '찬송(가)', '찬양(가)'라고 하거나, 노래를 할 때에 '찬양한다', '찬송한다'라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21세기 찬송가는 특히 가사면에서 지금까지 사용해 온 통일찬송가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예배와 찬송의 대상(Addressee)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지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금번에 수록된 찬송가에는 약 80%이상이 사람들을 향하는 노래로 꽉 채워져 있다.
또한 음악적인 측면에서 성도들이 부를 수 없을 정도의 도약진행과 엉성한 화성진행, 높은 음역 등 화성악적인 문제도 많다. 뿐만 아니라 약 45곡 정도의 단조 곡들이 수록되었는데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인가? 찬송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노래이지 사람들의 감정이나 기분, 그리고 분위기를 돋우는 음악은 아니다. 그런데 약 8%를 차지하고 있는 단조 곡들은 분명 인간들을 의식해서 만든 것이라고 생각된다.
21세기의 한국 찬송가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리고 모든 신자들이 즐겨 부를 수 있는 찬송가다운 찬송가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643년에 있은 웨스트민스트 종교회의에서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성경을 정경(正經)으로 채택하고 외경, 위경은 제외시켰듯, 이제 21세기의 길목에 선 우리나라 기독교의 찬송가도 무분별하고 혼합(재)된 성가의 수준에서 옥석을 구별하여 찬송가다운 찬송가 출간을 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 다음의 몇 가지 제언하고자 한다. 첫째, 외국의 경우처럼 '찬송가와 교회성가'로 구별하여 찬송가는 예배용으로, 교회성가는 교회의 각종 모임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개편하여야 한다. 즉 예배용 찬송가로 오직 예배에만 부르도록 하고 그 나머지는 교회의 여러 모임에서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둘째, 비록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해도 가사가 ∼(하, 높이, 찬양하)세, ∼찬양하라(하자), ∼합시다 등 그 받는 대상이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 드릴 수 있도록 우리나라에 맞는 어법으로 고치되 간접화법이 아닌 직접화법으로 고쳐야 한다.(예: 거룩거룩(1장), 만왕의 왕 주 하나님(17장).
셋째, 찬송과 예배의 대상으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용어에 보다 신중히 사용해야 한다. '예수'를 '예수님' 혹은 주님으로, '당신'을 '예수님' 혹은 '주님'으로 사용하여야 한다. 영어 표기에서 'Jesus'를 우리나라 말로 번역할 때는 '예수'로 표기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는 어른들이나 존경하는 분들에게 반드시 '님'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찬송가는 문학성을 살린 가사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의 찬양의 대상이신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적인 차원이다.
넷째, 번역상의 문제이다. 우리나라 찬송가 번역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한마디로 엉터리다. 왜냐하면 원시(原詩)와 전혀 다른 번역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의 번역을 보면 원시는 동쪽으로 가자는데 번역시는 서쪽으로 가겠다는 내용들이 있으며 있지도 않는 고유명사들을 임의대로 삽입하는 경우들이다. (중부대학교 장인식교수의 '한국『찬송가』에 나타난 영미시 번역상의 문제점' 참조 중부대학교 논문집 제14집(1999.11) pp.103-130 참조) 따라서 금번 기회에 번역시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개선하여야 한다.
다섯째, 한국인 작사·곡의 문제이다. 21세기 찬송가에 수록된 작품들 중 생존해 있는 한국인들의 작사·곡자들의 신앙적 문제점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작사·곡자들의 신앙적 문제와 더불어 작사·곡들의 성경적, 신학적, 문학적, 음악적인 측면을 모두 고려하여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2002년에 배포될 찬송가를 졸속으로 만들어 문제를 주기보단, 보다 심사 숙고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 가사위원과 음악위원은 교단적인 배정도 중요하지만 교회음악과 찬송가 학자들로 구성된 임원을 최소한 30명-50명 정도 위촉하거나 아니면 미국의 찬송가 위원회처럼 10명 내외의 전임 전문위원들로 하여금 이 일들을 평생토록 사역하도록 해야만 진정한 의미에서 21세기에 걸맞는 찬송가가 될 것을 확신한다.
오영걸 목사(주안에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