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전적 신학의 완성이 모든 신학자가 지향해야 할 궁극적 종착점이라는 아무런 논의와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마치 통전적 신학의 완성이 모든 신학의 지향점인 것처럼 자신들의 신학의 입장에서 자신들이 신봉하는 신학에 얼마나 근접했는지에 따라서 이제까지 교회와 선교의 역사에 흐르고 있던 신학 조류들을 비평하고 평가하는 강연을 한 것이다. 그것은 학술적인 강연에서는 보기 힘든 오만함의 발로였다.
물론 혼란스러운 한국 교계의 상황에서 강력한 신학적, 인물적 구심점이 필요했다는 것은 이해가 간다. 그래서 통전적 신학을 학문적 차원을 넘어 하나의 신앙으로 여기려는 의식이 팽배한 상황에서 그러한 강연을 펼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김명용 교수가 주장하는, 또 이종성 박사가 제창한 통전적 신학이 그러한 구심력을 갖을 수 있으려면 반드시 답하고 넘어가야 하는 질문이 생긴다.
신학은 논리가 아니다. 삶과 유리된 채 논리성과 수사학적 구조만으로 권위를 주장하는 신학은 썩은 시체 냄새나는 신학이다. 존 칼빈의 신학이 어떻게 종교 개혁을 이끄는 견인차가 될 수 있었겠는가. 그의 신학은 철저히 선교적 신학이었다. 또한 목회적 신학이었다.
즉, 선교의 현장에서 죄의 무게에 눌려 죽은 것과 다름 없는 한 영혼을 붙들고, 그 절망을 끌어 안고 눈물의 기도를 올렸던 그러한 간절함으로부터 나오는 신학이었다. 그러한 영혼의 갈급함을 채워주기 위한 목회적 신학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영혼에 더욱 무거운 짐을 지우는 제도화된 교회의 틀을 깨기 위한 몸부림의 신학이었다. 주님께서 자신에게 모든 것을 희생했듯이 자신도 죽음을
무릅쓰는 각오를 다지면서 정립했던 신학이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믿음의 조상들은 그러한 길을 갔다.
두 박사님에게 그러한 선교적 삶이 있었는지를 묻고 싶다. 신학의 힘은 삶에서 나온다. 그 날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어떤 이보다도 더 낮아짐으로 영혼의 구원을 위한 고난의 삶을 살았는가를 또한 묻고 싶다. 신학의 권위는 낮아짐에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