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가 사분 오열되어 개신교 신도의 3분의 1밖에 갖지 못한 카톨릭보다도 대 정부, 대 사회 발언권이 약하고, 마땅히 끼쳐야 할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수많은 신학교가 난립하였으나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내실 있는 교육을 할 수 있는 학교는 몇 되지 않으며, 수많은 기독교 단체들이 있으나, 거의 대부분 지도력 부족으로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이 말은 개신교도 카톨릭에서처럼 교회전체를 지도하는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는 말도 아니고, 개신교에 지도자들이 전혀 없다는 말도 아니다. 사실 한국 개신교처럼 큰 교회에서 한 분의 지도자가 모든 교회를 대표한다는 것은 오히려 바람직하지 못하다. 다만 서로 양보하고 도와서 어느 정도의 연합을 이룰 수 있을 만큼 훌륭한 지도자들이 너무 적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한국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달란트를 제대로 개발하지 못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지도자의 수준은 피지도자들의 수준과 맞물려 있다.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적 자질을 갖춘 사람이라도 피지도자가 그를 이해하고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수준이 낮으면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가치와 능력을 인정하지 안한 것이나, 구약시대의 참 선지자들이 왕들과 백성들로부터 배척을 받은 것이 그런 경우의 예들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너무 개인주의적이고, 질투심도 정상적인 정도를 넘어서 훌륭한 지도자의 출현이 매우 어렵고, 따라서 단결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그런 현상은 한국 기독교계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지금도 한국교회에 훌륭한 지도자적 자격을 갖춘 분들이 없지 않고, 다른 사회에서 활동했더라면 충분히 훌륭한 지도자로 그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을 분들이 한국에서는 그들의 능력과 가치가 이해되지 못하고 발휘되지 못하다. 특히 스스로 지도자연하는 소영웅들이 너무 많아 진정한 지도자의 출현을 방해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 편, 사람들을 따르게 하지 못하는 지도자는 진정한 지도자라 할 수 없다. 도덕적 타협과 원칙의 양보 없이는 지도자로 나설 수 없을 정도로 극한 상황이 아닌 한, 사람들의 추종을 받을 수 없다면 어딘가 약점이 있어서 그럴 것이다. 한국 사회가 정신적으로 그렇게 선진되어 있지는 않지만, 훌륭한 지도자가 전혀 발을 붙이지 못할 만큼 그렇게 막돼먹은 사회는 아니다. 그리고 훌륭한 지도자라면, 추종자들로 하여금 진정한 지도자를 따를 수 있도록 훈련시켜야 할 것이다. 오늘 날 한국교회가 그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피지도 자들의 자질도 그렇게 높지 못한 것은 역시 진정한 지도자적 자질을 갖춘 분들이 너무 적다는 것을 말해 준다.
어떤 이유에서이든 진정한 지도자의 결핍은 필연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큰 손해를 끼치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큰 지장을 초래한다. 한 집단이 당할 수 있는 가장 큰 재앙가운데 하나는 자격 없는 사람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고 지도를 받는 것이다. 유다가 받을 벌을 예언 하면서 이사야는 "그가 또 아이들로 그들의 방백을 삼으시며 적자들로 그들을 다스리게 하신다" (사 3:4)했으며, 그 결과로는 "백성이 서로 학대하며, 각기 이웃을 잔해하며, 아이가 노인에게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에게 거만할 것"(사 3:5)이라 했다. 모든 질서가 무너지고 연합은 깨어지면 모든 사람, 특히 그 집단의 약자들이 그 피해자가 되고 만다.
손봉호 교수(서울대 사회윤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