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의 열기와 복음에의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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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안팎이 온통 월드컵 열기에 휩싸여 있다. 말하자면 피버 노바가 굴러가는 방향에 따라 웃거나 우는 사람들로 지구촌이 갈라지고 있는 것이다. 개막과 함께 서서히 시작된 국내의 월드컵 열기는 가공할 만하다. 그야말로 피버 노바의 열기, 아니 광기란 말이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 이것 앞에서는 정치나 경제도 오히려 작아지고 만다. 이것은 이제까지 우리 사회를 갈라놓던 학연, 지연, 혈연, 심지어 종교간의 벽조차도 뛰어넘는 듯하다. 팔순의 할아버지부터 유치원생인 손자에 이르기까지 4700만이 하나 되어 응원에 나선 것이다.

거리는 온통 '붉은 악마'를 상징하는 빨간 옷과 태극기 물결로 출렁이고 있다. 그야말로 붉은 색과 축구 이야기로 이 땅이 불타고 있는 느낌이다. 모였다 하면 축구 이야기로 입이 바쁘다. 학교나 학원의 수업시간이 단축되고, 시험시간이 변경되어도 당연하게 생각한다. 기업들은 경품을 내걸었고, 음식점이나 술집에서는 승리를 자축하며 무료로 음식을 제공하기도 한다. 젊은이들은 경기장에서 못다 식힌 열기를 가라앉히려 소리지르며 밤거리를 방황한다. 평소에는 문제가 될 만한 그들의 언행이 어느 정도 용납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월드컵은 이 땅의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놓았다. 운동장에서는 계속 영웅들이 태어나고, 또 신화가 쓰여지고 있다. 축구에 관해서 문외한이었다는 어느 여류 작가는 한국과 이탈리아의 경기를 관전한 뒤에 "와- 그처럼 완벽하게 사람을 긴장시키고 흥분시키고 기쁨에 빠뜨릴 줄이야, 온갖 편견과 가난과 소외와 마음속에 쌓인 한이 분출되는 순간이었다"고 고백했다. 심지어 "추기경도 종정도 필승∼코리아"란 말이 다 나온다. "축구에 미친 대∼한민국"이라는 글귀도 눈에 띈다. 어찌 보면 '미쳤다'는 말 밖에는 이 상황을 달리 표현할 말이 없을 것 같다.

축구로 인한 이 광란의 열기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 외국에선 예배시간의 조정을 교단 차원에서 허용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예배와 경기 시간이 겹칠까 노심초사하는 교인들이 있는 걸 보면 국내 상황도 크게 다르지는 않은가 보다. 많은 설교에 월드컵 경기나 선수의 이야기가 인용되기도 한다. 물론 이번 대회를 선수나 관객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기회로 삼으려는 제자들의 열정도 눈에 띈다. 그러나 그것은 강력한 피버 노바의 열기 앞에서 너무나 작아 보인다.

피버 노바를 놓고 벌어지는 이 현상은 그 열기나 규모 면에서 일생에 한 번을 경험하기가 어려운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니 단군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며 흥분하지 않는가? 도대체 이 열광은 어디서 기인하며, 거기엔 어떤 의미들이 포함되어 있는가? 그리고 이런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 할 입장은 어떤 것인지 몇 가지로 정리해 보려고 한다.

먼저 월드컵과 관련해서 사람들이 보여주는 이 열광은 이제까지 우리 사회가 제공하지 못했던 스트레스 해소나 욕구 분출의 장을 월드컵 경기가 제공하게 됨으로써 시작된 것 같다. 특히 자신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선수들에 대한 감사와 또 다른 승리에의 기대감이 이 사회를 붉게 물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제 17회 한-일 월드컵 이것만큼 우리 사회를 하나로 만들고, 마음을 시원케 하는 일이 과거에 또 있었을까?

사실 우리 사회는 지연, 학연, 혈연 등을 근거로 갈라져 싸우는 일에는 익숙해 있었지만 이런 것들을 뛰어넘는 공통의 목표를 갖고 분투할 기회는 별로 가져보지 못했다. 따라서 모처럼 마련된 이 기회에 어깨동무를 하고 목이 터져라 외치는 가운데 느끼는 그 후련함은 더운 날의 청량음료에 비길 수가 없을 것이다. 거기에 세계의 축구 강국들을 물리치는 승리가 이어지고 있으니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그러니 월드컵을 통해 국민 화합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희망적인 말이 나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고대 그리스 시대로부터 스포츠를 통해 추구되어지던 세계인의 이상이 평화와 화합이다. 그러나 이런 이상의 항구적 실현은 언제, 어디서고 가능하지가 않았다. 월드컵 경기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회가 끝난 후에도 이런 열기나 분위기가 지속됨으로써 우리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리라고 기대하지 않는 것 같다.
대학시절 어떤 교수님이 "학문은 게임이고, 게임의 특징은 그 결과가 죽고 사는 문제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려주신 적이 있다. 이 정의가 맞는 것이라면 축구 경기는 엄연히 게임이고, 그 결과는 우리 삶에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 것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축구를 둘러싸고 발생한 이 광기에 대해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게임은 어디까지나 게임일 뿐이니까.

한국팀이 세계 8강이나 4강, 혹은 더 나아가 우승을 쟁취해도 변하지 않을 사실은 월드컵 경기는 스포츠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의 게임이라는 것이다. 축구로 인해 이 사회에 생겨난 강한 열기 속에서 불타는 카르타고를 바라보며 눈물 흘린 스키피오의 지혜를 갖자고 말하면 너무 썰렁한 이야기가 될까? 중세 유럽의 기독교 세계를 들끓게 했던 십자군 전쟁도 월드컵의 이 열기와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11세기 말 우르바누스 2세 교황은 끌레르몽에서 이교도 정복을 위한 십자군 전쟁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고 있었다. 그의 외침에 대해 많은 서구인들이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신다"라고 화답하였고, 전 유럽은 전쟁의 광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전쟁놀이를 즐기는 소년들이 자주 인용하는 '정의의 십자군'이란 말은 여기서 유래한다. 그러나 역사는 그 전쟁의 결과가 스스로 내건 명분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나갔는지를 잘 보여준다.

전투를 수행할 수 없는 소년들이나 농민들의 십자군이 결성되어 많은 희생이 뒤따르기도 했다.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그 결과는 더더욱 참담한 것이었다. 소위 하나님의 아들들이 행한 그 잔인한 살상에 대해 뭐라고 변명할 것인가? 그리스도인 형제들을 위한 원정의 경비를 마련하려고 같은 기독교 국가를 청부 공격한 일은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외에 장사꾼들의 이윤추구를 비롯해서 원정대원들이 보여준 탐욕을 감안할 때 '정의의 십자군'이란 말은 무색해지고 만다.

동기에 대한 분명한 이해 없이, 들뜬 분위기에 편승하여 방향을 잃어버리는 것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이교도 탄압이란 명분에 현혹되어 보여준 저 십자군의 전혀 정의롭지 못한 행위와 그로 인해 발생한 엉뚱한 결과들은 오늘 축구를 통한 국민 화합, 그리고 사회경제적 반사이익에만 관심을 갖는 태도를 경계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과거 우리 사회는 정치나 경제,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에게 많은 기대를 갖고 살아왔다. 그리고 그에 비례하는 실망감을 느끼며, 답답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 월드컵 경기장의 선수들이 이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월드컵 경기는 하나의 게임일 뿐이고, 그 파급 효과 역시 한계를 갖는 것일 수밖에 없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우리 사회는 이전으로 다시 돌아가 "네 탓이오!"를 외치며 분열의 길을 걷게 될지도 모른다.

월드컵의 열기가 치솟고 있는 이 시점에 교회와 민족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했던 '엑스플로 74'나 '민족복음화대성회' 같은 행사들을 떠올리는 것은 왜일까? 그날 거기서 헌신된 젊은이들의 삶이 오늘날 우리 민족과 세계의 화해나 복음화를 위한 초석이 되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이런 이유에서 정치나 경제, 또는 스포츠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품은 복음에의 열정을 통해 진정한 화합과 평화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소원해 본다.

총신대학교 역사교육과 김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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