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한달은 내내 짙은 절망감에 탄식을 토해낼 수 밖에 없었다. 계속된 장로교의 수십개 교단들의 정기총회를 통해 오고가는 많은 사안들 중에 여성목회자 안수건이 혹여나 통과될까 바라보는 마음은 이른 봄 심어놓은 씨앗의 싹이 따뜻한 봄기운에 돋아나기를 조마조마하게 기다리는 어린아이의 마음과 같았다. 괜시리 여성과 인권을 존중하는 티를 내보려는 것은 아니었다. 복음을 알지 못하는 세속의 사회조차 여성의 인권을 존중하자는 풍토가 조성되고 있는 시점에서, 한국교회가 이들보다 더한 관용의 모습을 보여주기 원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세계는 진정 성령 안에서 자유함과 모든 이의 하나됨, 관용으로 넘치는 세계가 아니던가! 하지만, 총회 석상의 총대위원들은 그 여린 순이 자랄 여지도 없이 밟아 뭉게버렸다. 어느 총회에서는 아예 여성 안수집사를 세우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무엇인가 한국교회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는 여인들, 다말과 라합, 룻, 우리아의 아내. 이스라엘을 이방의 위협 속에서 건져내었던 여선지자 드보라. 여성을 재산 목록 중 1호로 생각했던 유대인들의 역사에도 여성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의 계보를 이어온 믿음의 사람들로 자리잡고 있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통해 여성을 멸시하고 인간으로 조차 취급하지 않던 완고한 유대인들을 철저히 고발했다.(마1:1-16) "이 답답한 유대인들아! 성경을 잘 주목하여 보라."
많은 이들은 사도 바울이 '교회에서 여성이 잠잠해라 했다'는 것을 근거로 여성 목회자들이 강단에 세우는 데 거부감을 표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목회서신에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she must be silent)'(딤2:12)고 적었다. 바울의 이같은 말은 많은 여성 신학자들이 바울을 지탄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여성의 지위가 비교적 높았던 헬라 교회에서 여신도들의 발언권이 강해 교회에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았던 그 당시 시대적 정황 가운데 나온 권면이었다. 사도 바울의 편지가 전해진 대상은 이방인의 대표교회인 안디옥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는 디모데를 향한 것이었다. 편지라는 것은 특정한 대상을 향해 쓰는 것이 아니던가! 물론 그 안에 모든 이에게 보편적으로 해석되는 부분이 있지만, 정황에 맞게 해석되어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군대에 있는 청년을 향해 쓰는 편지가 사회에서 생활하는 친구에게 쓰는 편지와 다른 것은 자명한 이치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로마와 빌립보 교우, 고린도 교우, 갈라디아 교우, 데살로니가 교우 들에게 쓴 편지는 다 그들이 처한 정황에 따른 것이었다. 대상이 없이 허공에다 편지를 쓰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또한 바울은 남자 성도들에게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며, 자기의 몸을 아내가 주장하게 하라"(고전7:3-4)고 강조했으며,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였느니라"(고전12:13)고 고린도 교우들에게 권면했다.
남종이나 여종이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율법있는 자나 율법없는 자나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형제 자매임을 고백하는 것이 교회가 아니던가? 진정한 교회는 남녀노소를 무론하고 서로가 서로를 섬기고 높이고, 짐을 지는, 이로 인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갈6:2) 공동체이다.
진정으로 한국교회 안에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균형잡힌 성서적 해석이 부재한 상황이며, 심지어 남성우위의 기득권 문화를 유지하기 위해 편협하게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여성의 인권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 이는 복음을 전혀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현상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그 순간, 그 아픔과 고통을 함께 했던 이들은 한국교회가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며 거부하고 있는 여성들이었으며, 부활의 첫 증거자도 여성이었다. 하와로 인해 무너진 하나님의 세계가 있었지만, 그것이 여성들을 통해 다시금 회복되었음을 또한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만인을 존중한다. 주의 사랑으로 모든 이를 사랑한다.' 말을 잘도 하지만, 그 안에는 절대 무너질 수 없는 완고한 장벽이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세상의 어떤 것보다 높고도 높은 허물어지지 않을 견고한 성처럼 보인다. 진정한 사랑과 관용이 사라진 숨막힐 듯 답답해진 한국교회를 바라보며, 이러한 곳에 진정 성령의 역사가 임할 수 있을까 하는 안타까운 탄식만을 더할 뿐이다. 한국교회가 여성들을 향한 인식을 새롭게 하지 못한다면, 진정으로 모든 이들이 주안에서 하나되고 서로가 사랑의 종이되는 천국의 모형을 만드는 데 실패하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 안에 모든 이를 자유케 하는 성령이 역사하실 수 있는 공간이 더욱 필요한 시점이다. 내년에는 정말 바뀔 수 있을까? 기도할 따름이다.
여성 목회자 안수 문제는 단순히 여성 인권 수호적 차원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적인 측면에서도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노승현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