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은 기독교 진리를 변호하고 거짓된 이단을 물리치기 위해 많은 글을 썼다. 교부(敎父)들의 글과 저서는 신학의 기초를 놓았고 바른 전통을 계승하는데 이바지했다. 또한 책은 교회갱신과 부흥의 도구가 되기도 했다. 때로는 박해 당하는 성도들의 위로자가 되었으며, 진리를 찾는 자들의 안내자가 되었다.
기독교고전과 양서들은 하나님의 귀중한 선물이다. 독일 경건주의의 아버지 필립 야곱 스페너는 영국 청교도들의 글을 읽고, 그들의 실천적 경건을 통해 도전을 받았다. 감리교의 존 웨슬리는 1738년 5월 24일 저녁 모라비아 형제단의 집회에 참석했다가 누군가가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는 것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였고, 구원의 복음을 만났다.
교회사를 보면 기독교고전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n of Christ), 파스칼의 팡세(Pens es), 존 번연의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과 같은 책들을 통해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거나 영적 자유를 얻었으며, 주님께 헌신하기도 했다. 기독교의 역사는 책의 역사다. 신앙생활과 독서는 서로 나눌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조만제 교수('책 읽는 젊은이에게 미래가 있다'의 저자)에 의하면 젊은 날의 독서는 봄에 좋은 씨앗을 많이 뿌리는 일과 같다. 그러므로 흡수력과 성장력이 강한 청소년 시절에 좋은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그는 청소년기에 엄격한 규칙을 세워놓고 독서를 실천하였고, 자녀 교육에 있어서도 책읽기를 강조하였다.
그에 의하면 독서는 취미가 아니라 생활이다. 독서란 인간이 인간답게 성장하는 데 필요한 일이다. 결국 독서의 의미는 동서고금의 위대한 사상가 및 학자들과 친밀히 교제함으로써 가치 체계를 확충하며 지식을 넓혀 인격의 완성을 돕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독서란 금방 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계속해서 우리의 정신과 사상 그리고 인격에 영양분을 줄 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나타난다.
조 교수에 의하면, 책은 선인들의 유산으로서 그 시대에 대한 경의(敬意)와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읽어야 한다.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하루 평균 3시간 이상 독서를 했다. 문고본을 가지고 다니면서 틈 나는 대로 읽었고, 감명 깊고 좋다고 생각되는 책은 재독, 삼독 하였다. 차츰 독서 수준이 높아지면서 정독으로 방향이 바뀌었고, 천천히 한줄 한줄 음미하면서 책 읽는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소그룹을 사용하여 교회갱신의 역사를 일으키셨다. 그 소그룹은 다양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성원들은 대개 교회의 영적 유산이 담겨진 책을 통해 신앙이 성숙하였고, 무기력해지고 제도화된 교회의 문제점을 식별할 수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소수의 영적 각성자들을 사용하셨고, 그 촉매로써 책은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다. 우리는 그 실례를 교회사에서 무수히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사도적 전통에 서있는 믿음의 선진들의 영적 유산으로서의 책은 하나님께서 주신 귀중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16세기 종교개혁을 깊이 연구한 W. 스탠포드 리드에 의하면, 소그룹 성경연구반이 종교개혁 추진을 크게 도와주었다.
이런 의미에서 독서모임을 통한 경건운동은 매우 중요하고 필수적인 전략이다. 한스 큉도 지적했듯이 한 지역에서 한 목회자의 행동은 큰 주목을 끌지 못한다. 그러나 한 지역에서 5명의 교역자가 목소리를 합치면 주목을 끌게 된다. 50명이 참여하면 엄청난 영향력을 갖게 된다.
이제 한국교회는 책을 읽는 성도를 키워야 한다. 연령별로 매년의 독서계획을 제시하고, 매월 신간을 소개하고, 교회 형편에 따라서 작은 도서관도 운영하고, 교회 안에 독서모임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독서를 강조하는 것은 지식 편향의 '머리만 큰' 이지적 그리스도인이 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균형있는 신앙의 회복과 생명력 넘치는 풍성한 삶을 위해 책을 읽자는 주장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나(자아)를 아는 지식이 모든 지식의 근본이라면, 이러한 지식의 반석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적극적 독서인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스도인의 앎(지식)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지성의 제자도」에서 제임스 사이어는 이렇게 말했다.
"믿는 것과 아는 것 사이에는 실로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고 그것들이 확증되는 것을 발견할 때,우리가 믿는 것을 알게 된다.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서로에게 본질적인 부분이다. 우리가 안다면 우리는 행동한다.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오스 기니스도 "아는 것을 행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적 앎의 모든 것이다"라고 했다. 성경에 의하면, 진정한 앎은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른 앎과 경건의 실천을 위해 끊임없이 읽고 또 읽자.
송광택 목사(한국 교회 독서문화연구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