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문화에대한 해석과 관점이 아무리 다양하다 할찌라도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감정과 정서 그리고 이성과 규범은 어느 정도 동일선상에 놓여 있다고 본다. 찬반양론이 극렬히 대립되는 사안에 대해서도 각기 다른 주장을 표명하는 반대입장에선 사람들도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말그대로 대중이 공감하고 인정하는 문화는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기윤실을 비롯한 음대협(음란폭력성조장매체대책시민협의회)이 문제삼고 있는 음란하고 폭력적인 메시지를 담은 대중문화가 우리 대중문화 환경의 주류는 아니다. 대중문화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의견과 마찬가지로 모든 대중문화는 세속화되었다고 보는 입장도 성경적이지 않다. 미디어를 통해 쉼 없이 전달되는 대중문화가운데도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들에게 가르치는 중요한 교훈들을 전해주는 아름다운 메시지를 담은 수작(秀作)들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얼마전까지 개봉되었던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는 지난 9월 8일에 폐막된 베니스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신인연기상과 함께 국제비평가협회상, 카톨릭언론협회상, 청년비평가상 등 5개부문에서 수상한 수작중에서 수작이다. 이 영화는 전과자 남자와 중증뇌성마비장애인 여자와의 사랑을 그린 영화이다. 결코 화려하진 않지만 어눌하고 절제된 대사와 함께 혼신의 연기를 보여준 문소리와 설경구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약자들을 바라보는 오만한 우리들의 시선을 부끄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다행히 영화 '오아시스'를 많이 사람들이 찾았고 그 결과 전국적으로 115만 명이나 되는 관객이 관람함으로써 작품성 있는 영화를 홀대하지 않는 수준높은 문화소비자의식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아직까지도 우리들은 작품성 보다는 가벼운 웃음거리와 흥미를 주는 영화를 더 많이 찾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 '오아시스'가 두 달 동안 115만을 동원하며 분투했을 때, 조폭패밀리의 웃기는 결혼작전을 소재로 한 영화 '가문의 영광'은 개봉 한 달만에 전국관객 400만을 훌쩍 넘기는 흥행성공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우리들에게 가장 친근하고 가까운 미디어인 TV에서도 재미와 오락으로 점철된 프로그램들이 시청자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전국민의 50%이상이 시청할 정도로 인기를 자랑하는 SBS 드라마 '야인시대'는 시청률 조사회사인 닐슨미디어 리서치 조사결과 15일밤 시청률이 51.5%(전국 기준)으로 7월 29일 방송 이래 최고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이는 58.3%를 기록한 KBS1 ‘태조왕건’의 마지막회(2월 24일)에 이어 올해 두 번째로 높은 것이다. TV를 켠 시청자 중 ‘야인시대’를 본 이들의 비율을 뜻하는 TV 점유율은 64%를 기록했고 분당 최고 시청률은 드라마 종료 직전인 밤 11시 3분 57.4%였다.
또한, 각 방송사 편성비율도 오락 프로그램이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지난달 9일부터 15일까지 편성된 각 방송사별 연예오락, 드라마, 스포츠, 시트콤, 만화영화 등의 ‘오락프로그램’편성비율을 보면 평일의 오락프로 편성비율이 KBS2 54.9%, SBS 52.4%, MBC 44.3%에 달했고 주말에는 KBS2 80%, SBS 66.9%, MBC 67.6%까지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주말 주시청시간대인 오후 6시부터 11시까지의 편성비율은 KBS2 83.3%, SBS 83.3%, MBC 75%대로 더 높아진 것을 볼 수 있다.
반면에, 청소년을 주제로 한 유일한 프로그램 KBS1 '접속, 어른들은 몰라요'는 시청률 저조라는 이유로 가을 개편 폐지 명단에 올랐다. '접속, 어른들은 몰라요'와 사정이 비슷한 KBS1 '현장다큐-선생님'도 같은 운명을 맞게 됐다. 10월말 가을 개편을 앞두고 KBS 내부에선 '교양을 가미 혹은 가장한' 예능 프로그램이 대거 신설된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사람들이 보지 않는다는 이유로 소문은 진실이 되어 진짜 교양물인 두 프로그램은 일찌감치 퇴출로 결정되었다.
'접속, 어른들은 몰라요'는 10대 평범한 청소년들의 이야기다. 다른 프로그램들이 전교 1등이나 깡패 학생 등 소수에 주목했던 반면 이 프로그램은 여드름 때문에 고민하는 여학생과 같은 평범한 청소년을 카메라에 담아 방영했다. 학생들은 "딱 내 얘기네"라며 공감을 했고 학부모들과 교사들에겐 청소년 이해의 통로로 호평을 받아 왔던 프로그램이었다. '현장 다큐-선생님'도 교권이 땅에 떨어진 악조건에서도 참교육을 위해 애쓰는 교사들의 노력을 담아 감동을 전해준 질적인 면에선 어느 프로그램보다 빛나는 작품이다. 그런데 시청률에서 발목이 잡힌 것이다. 공영방송인 KBS가 광고방송을 하지 않는 가운데서도 시청률 때문에 호평을 받는 프로그램을 폐지시키려는 것은 시청자들을 우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락 프로그램 위주로 편성하고 시청률이 떨어지는 프로그램을 폐지시키는 각 방송사만 탓할 일만은 아니다. 시청자들인 우리 자신이 재미와 흥미만 전달해 주는 프로그램만 선호했기 때문에 우리는 TV 브라운관을 통해서 그런류의 프로그램만 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우리가 소비하는 대중문화 모두가 소비형태에 따라 생산의 질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문화소비자인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좋은 문화소비자가 있어야 좋은 문화상품을 만드는 문화생산자들이 더 많아 진다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좋은 문화소비자의 눈을 가져야만 한다. 그것은 곧 문화의 질(quality)을 따져 보는 것이다. 그 문화 안에 유용한 정보와 건전한 오락의 기능이 있는지를 따져보고, 인생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이 극적으로 잘 묘사되었는지를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의 극소수인 돈있고, 힘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보다도 서민들과 사회적인 약자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일깨워 주는 문화는 우리들이 사랑해 주고 격려해 주어야 할 것들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논리와 다수의 논리로 우리들의 대중문화의 균형을 깨뜨리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침묵하지 말고 방송사와 제작자들에게 정당한 의사를 표현하는 것은 문화에 대한 바른 안목을 길러주는데 좋은 자양분이 될 것이다. 그리할 때, 우리들은 무엇을 보고 들으며 즐겨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선택권을 폭넓게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주성진(기윤실 문화소비자운동본부 정책간사 / gidohasey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