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예수와 바울은 자발적 가난의 삶을 살았고 가난한 민중과 함께 하는 삶의 길을 열었다. 갈릴리의 예수운동과 바울이 전한 초기 기독교는 국가권력과 사회의 부를 누리는 영광의 종교가 아니라 박해받는 십자가의 종교, 명예와 부가 없는 종교였다. 예수도 다 뺏기고 수치스럽게 십자가에 달렸고 바울도 온갖 고난과 수치를 당하다가 로마황제에 의해 처형당했다.
이런 기독교가 세상의 부와 권력을 누리는 영광의 종교로 되면 맛 잃은 소금처럼 구원의 힘을 잃고 만다. 서구에서 중세 가톨릭 교회가 그랬고 19-20세기 개신교가 그랬다. 가난한 민중의 복음을 전할 수 있을 때 기독교는 힘을 낼 수 있다. 물론 가난 자체가 복음은 아니다. 부와 권력이 없는 자리, 가난한 자리에서도 믿음과 은혜가 충만하고 기쁨이 넘치고 나눔과 섬김의 구원사건이 일어날 때 복음의 능력이 작용하는 것이다. 돈과 권력 없이도 행복할 수 있는 영의 자유로움, 얼의 성숙이 있어야 자발적 가난의 영성과 복음이 나온다.
아시아는 가난한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지역이고 자발적 가난의 영성적 전통이 깊은 곳이다. 아시아는 가난과 영성의 결합이 자연스럽고 오랜 훈련과 경험을 지니고 있다. 유교도 부지런하고 절제된 삶을 강조하고 도교는 자연과 어우러진 소박한 삶을 내세우고 불교는 욕망과 허영을 버린 금욕의 삶을 추구했다. 아시아의 종교들은 자발적 가난의 영성을 길러주었다.
특히 한국종교문화는 자연친화적인 신선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다. 한국인은 오랜 세월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살았기에 자연과 하나가 되고 자연 속에 녹아들려는 꿈과 염원을 품고 있다.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연 속에서 자연을 벗삼아 자유롭고 소박한 삶을 살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흙 밭에서 풀벌레들과 함께 별을 보며 살고 싶다는 한국인의 꿈, 자연 속에 녹아드는 신선이 되고 싶다는 꿈은 자발적 가난의 영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원융합일과 원융무애를 추구하는 둥글고 소박한 자연친화적 영성, 통나무의 소박하고 둥그런 정신문화적 원형질을 한국인의 마음 속에 지니고 있다. 치열한 죄의식과 날카로운 정의감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십자가신앙의 곧은 막대기 같은 정신과 한민족의 둥글고 소박한 정신이 만나면 깊고 원만한 자발적 가난의 영성이 나올 수 있다.
이세종과 이현필의 철저한 자발적 가난의 영성, 류영모와 함석헌의 실천적 가난의 정신, 성 프란시스코를 숭모했던 김재준과 송창근의 자발적 가난의 영성, 이용도의 신비적 영성과 가난의 삶은 우리에게 자발적 가난의 위대한 영성을 보여준다. 이들은 모두 종교개혁신앙의 원리에 따라 한국적이고 기독교적인 자발적 가난의 영성을 드러냈다.
1) 이용도의 영성
이용도는 한국교회의 개혁을 추구한 신비가였고 자발적 가난의 영성을 추구한 이였다. 그는 현대를 사랑의 시대로 보고 믿음이 사랑으로 완성되어야 한다고 보았다.(일기. 1930. 1,23. 96쪽.) 이용도는 예수는 영광스럽고 찬란한 곳이 아니라 비천하고 낮은 고난의 자리에만 계시다고 보았다. "오 주여 제가 지금까지 경험한 주님은 너무나 천한 주님이시었나이다. 너무나 무력한 주님이었고 너무나 비근한 주님이었나이다."(일기. 1931. 5.7. 161쪽.) 나는 한 학도로다...모든 사람, 모든 사물 이는 다 여호와의 거룩한 음성이었나니라... 저 어린애, 걸인, 천녀(賤女), 곤충, 금수, 초목! 이는 다 나의 선생임을 깨달았노라. 귀인과 지식은 물론!이고...모든 것에 대하여 무릎을 꿇리라. 그리고 절하고 배우리라."(일기. 1929. 12.19. 70-71쪽.)
일제 식민치하에서 폐병3기의 절망적인 삶을 살면서 그는 기도에서 힘을 얻었다. 그는 기도를 "하늘도 땅도 다 손아귀에 넣고 죽엄, 간난, 고민, 신고를 다 한 덩어리로 만들어서 주먹에 넣고 사는"(이용도목사저술집. 신생관, 1975. 265쪽.) 길로 보았다. "새로운 힘이 하늘을 뚫을 것 같고, 땅을 문허트릴 것 같은 것"(서간집. 25쪽.)을 얻는 곳이 기도라고 그는 보았다.
또 이용도는 이런 말을 남겼다:
"兄아! 나는 나의 일에 대하여 아무 手段도 방법도 없는 것을 알아다오. 무슨 깊은 철학적 원리를 나에게 묻지 말아다오. 죽음! 이것만이 나의 수단이오 방법이오 원리라고나 할까!
그리하여 날마다 죽음을 무릎 쓰고 그냥 무식하게 돌진하려는 것뿐이다. 어느 날이든지 나의 빛없는 죽음! 그것이 나의 완성일 것이다. 형아! 나는 理없이 光없이 죽으려 한다. 뒤에 理있이 光있이 싸울 사자가 나오기를 바라면서. 나는 無理하게 죽을께 형은 有理하게 살아 주지 않으려나! 나는 法없이 條理없는 운동에 祭物이 되거든 형은 法적으로 條理있게 일하여다구! 이를 위하야 나는 먼저 떨어져 죽는 작은 밀알 한 알갱이가 되려 하노라"
이용도에게서 종교개혁의 신앙원리가 철저히 실행되고 자발적 가난의 영성이 솟았다.
2) 몸과 살림의 영성
자발적 가난의 영성은 몸과 살림의 영성이 되어야 한다. 1997년에 인도에서 달릿, 불가촉천민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달릿 장애인청소년들의 재활교육센터에서 하룻밤 자면서 함께 지냈는데 삐쩍 마른 장애인 청소년들의 찬송소리가 너무나 힘차고 영감에 넘쳤다. 배고픈 창자에서 은혜와 영감이 넘침을 알았다. 너무 많이 먹어서 몸에 폭력을 행사하고 몸을 학대해도, 너무 적게 먹어 몸을 학대해도 몸의 평화를 잃고 관계가 파괴된다. 알맞게 먹어야 평화와 살림이 이루어진다.
살림보다 먼저 숨을 잘 쉬어야 한다. 숨에는 목으로 쉬는 목숨, 말로 쉬는 말숨, 위로 하나님과 쉬는 우숨이 있다. 목숨, 말숨, 우숨은 은혜로 쉬는 것이고 숨이 깊고 편안해야 살림이 제대로 된다. 숨은 속이 비고 마음이 비어야 잘 쉬어진다.
몸과 맘이 비어야 가벼워져서 몸과 맘을 쉽게 움직이고 잘 나눌 수 있고 섬길 수 있다. 자신을 돌멩이로 여길 수 있는 빈 마음을 지녀야 어디든 가서 나누고 섬길 수 있다. 몸과 맘이 무거우면 나눔과 섬김의 사람이 되지 못한다.
박재순 목사(열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