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많은 기독교인들조차도 청교도들의 신앙을 시대에 뒤떨어지는 고리타분한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 영적, 도덕적 순결을 주장하고, 지나칠 정도의 금욕주의를 내세우는 이들을 비하하고 비꼬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들 안에 있는 신앙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모든 것을 육적인 눈과 이성적인 잣대로 평가하는 천박한 기독교인들의 이해에서 기인한 것이다. 청교도들의 엄격한 도덕과 주일의 절대적 엄수, 가정의 중요성 강조, 향락의 제한을 주창한 선포는 당시 형식주의에 물들고 변질되어가던 신앙의 참된 본질을 지켜주는 소금과 같은 것이었다. 이는 편의주의적 신앙과 정욕, 세상의 시류에 휩쓸려 빛도 발하지 못하고 아무 맛도 내지 못하는 소금이 되어버린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다시금 잇고 계승해나가야 할 소중한 신앙의 유산이다.
또한 청교도들은 오히려 로마 가톨릭적인 제도·의식(儀式)의 일체를 배척하며,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높이는 '성서 중심의 칼뱅주의'를 주창하며 개혁 운동을 벌인 개혁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죽음을 각오하고 미지의 땅을 향해 나아갈 만큼 도전적이고 진취적이었다. 또한 종교적인 자유와 정체성을 찾아 신대륙으로 건너왔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자유를 소중히 여겼고, 신대륙에서 새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스스로 일구고 가꾸어 냈기 때문에 인간의 평등을 강조했다. 나아가 특정 교파만을 강요하지 않고 다양한 종교들을 인정했던 청교도들의 유연성은 다민족 국가가 큰 분쟁없이 살아갈 수 있는 오늘날 미국 문화의 다양성과 복합성 속의 조화를 이루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 신대륙 개척초기 청교도들이 보여준 신앙의 모습은 이들의 수준높은 영성을 보여주고 있다.
1620년, 성경 말씀대로 경건하게 살려는 청교도들은 형식주의적 신앙에 젖은 영국의 국교도와 잦은 신앙의 갈등 끝에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떠났다. 180톤의 작은 배에는 102명의 사람들이 탑승했다. 조그마한 범선에 불과한 메이플라워 호(虎)였지만, 여기에는 큰 꿈과 희망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65일간의 긴 항해를 마치고 신대륙에 첫 발을 내디딘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젖과 꿀이 넘치는 땅이 아니었다. 출발한 102명중에 많은 이들이 선상에서, 그리고 도착 직후 항해의 피로를 이기지 못해 죽었다. 때마침 도착한 신대륙의 계절은 겨울이었다. 신대륙에 도착한 이들은 심한 식량난과 추위, 기후 차와 영양실조들로 그해 겨울에 102명 가운데 44명이 죽었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풍토병에 시달렸다. 그 결과 3가정 외에는 병에 걸리거나 죽어갔다. 그해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거둔 첫 수확의 결실도 형편없었다.
이처럼 신앙의 자유를 찾아 떠난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소중한 가족의 죽음과 보잘 것 없는 결실이었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한 해 동안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인디언들의 도움에 감사하고자 첫 소산으로 추수감사절을 지켰다. 이들은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하며 입술로 범죄하지 않은 욥과 같이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을 돌리는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만약 청교도들이 신대륙에 도착해 부딪힌 고난 앞에서 입술로 하나님을 저주하고 신앙을 버렸다면, 신앙의 국가 미국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의 미국이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계승해야 할 선조들의 신앙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해 추수감사절을 맞아 청교도들의 신앙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육을 무익하게 보고 영을 소중하게 보았던 그 세계를 한국교회도 깊이 있게 주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이면의 깊은 세계를 묵상할 수 있어야 하겠다.
사도 바울은 딤전4장 4절에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라고 말했으며,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감사하라"(살전5:18)고 권면했다. 그리고 타락한 인류의 가장 큰 죄로 '감사함을 잃어버린 것"(롬1:21)을 지적하고 있다. 올 2002년의 추수감사절을 맞아 죽음과 질병 속에 고통당한 신대륙의 청교도들 안에 넘쳤던 감사의 이유를 찾아보는 것은 우리에게 남겨진 소중한 숙제가 아닐 수 없다.
노승현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