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는 가장 민주적인 교회지도자 선출의 제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방이후 70년대 까지 독재정권을 억제하는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와 신군부 정권이 권위주의적 독재체제를 유지하려고 했을 때 한국교회는 믿는 젊은이들이 공선협을 결성하게 해서 이에 저항하는 시민운동을 지원함으로써 국민직선 대통령제를 쟁취하는데 하나의 역할을 하였다.
1.한국교회의 정치참여에 대한 반성과 올바른 정치신학
1) 한국교회의 자기 반성
한국교회는 여태까지의 정치참여에 대하여 깊은 자기 반성을 해야 한다. 한국의 보수교회는 권력지향적 자세를 반성해야 하겠다. 대한민국의 최초 자유당 정권은 기독교인들이 이끈 정권이었고 기독교 부흥에 기여했다. 그러나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의 동상을 만들고 3.15 부정선거를 저질음으로써 이에 저항한 시민혁명에 의하여 무너졌다. 당시 교회와 신자들은 독재로 나아가는 정권을 견제하는 세례 요한의 자세를 보여주지 못했다. 그리고 박정희 군사정권이 1970년에 삼선개헌을 하고자 했을 때 보수교회는 이에 대하여 경고하기는 커녕, 삼선개헌 찬성 성명서를 신문지상에 크게 내고 이를 대가로 신학교 인가를 받았다. 그리고 80년대 광주 항쟁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등장한 신군부의 정권 시절에는 소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 참여하여, 신군부들에게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하는데 기여하였다. 아직도 한국교회에는 1백개가 넘는 군소교단이 난립하고 있으며 무허가 신학교들에게 무자격 목사들을 양산하는 약점을 가지고 있어서 권력에 대하여 전혀 이를 견제하고 바른 통치자의 자세를 일깨워주는 위치에 있지 않다. 그러나 이들은 제쳐놓고 국내외적으로 공인받는 10개의 교단만이라도 여태까지의 잘못 처신한 것(신학교 인가를 받기 위해 그리고 각종 정원외 입학 및 등 탈법 사실을 무마하기 위해 정부와 각종 거래한 일, 신군부시절 국보위에 참여 등)에 대하여 깊은 반성을 해야 할 것이다.
2)정치신학 - 정치의식을 일깨우는 신학 - 의 요청
한국교회는 정치에 대한 올바른 관계를 갖기 위해 올바른 정치신학이 요청된다. "정치신학"이란 이 단어가 가지는 부정적 함축성 때문에 부정적으로 이해해서는 않된다.
정치신학이란 교회나 신학이 정치나 권력기관의 시녀가 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1960년대에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와의 대화의 결과로 유럽에서 “정치신학”이라는 새로운 신학적 흐름이 생겨났다. 독일 뮌스터 대학 교수인 요한 밥티스트 메츠(Johann Baptist Metz)가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다. 메츠가 정치신학의 과제 아래 “기독교 신앙의 사유화를 극복하고 교회의 비판적 해방적 기능을 각성하는 일”을 중시하는 데 대하여, 몰트만은 “시민종교와 정치종교를 기독교적으로 비판하는 일을 전면에 부각시켰다." 정치신학은 교회가 정치화 되거나 신학이 어용화 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정치신학은 기독교적 교리를 가지고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정치신학은 교회와 신자의 정치적 의식을 일깨우는 신학이다. 정치신학은 기독자의 양심에 근거하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의와 불행과 부조리의 상황에 직면하여 고통을 겪고 거기에 대항해서 투쟁하는 기독교 신자의 신학적 반성이다.
정치신학의 주요의도는 “교회를 ‘정치판으로 만들자’는 게 아니고, 교회정치와 기독교인들의 정치를 ‘기독교인 답게 하자’는 것”이다.
사실 독일 튀빙겐의 소망의 신학자 몰트만이 제시하는 정치신학은 나치시절 1934년 헌법학자 칼 슈미트(Carl Schmitt)가 내걸었던 옛 정치신학을 반대하고 교정하는 정치신학이었다. 당시 슈미트는 “국가를 지탱하는 모든 정치적 개념들은 세속화된 신학개념들이라는 점과 한 시대의 신학적 패러다임과 정치적 패러다임 사이에는 항상 하나의 상응관계가 있다는 점을 증명하려고 하였다. 더욱이 슈미트는 친구와 적(敵)이 생존 투쟁하는 ‘비상사태’ 중에는 독재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피력하여, 나치의 독재를 정당화시키는 어용적 정치신학을 펼쳤다. 몰트만의 새 정치신학은 이러한 종교정치를 배격하고 교회의 정치권력화를 비판하고 있다. 옛 정치신학은 ”사회 안에서 교회의 재산을 보존하고 교회의 힘과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일에만 온통 관심을 기울였다. 이에 반해서 몰트만이 제시하는 새 정치신학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자신의 근원을 두고 있는지 또 거기서 자신의 정당성을 찾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의 메시지가 제시하는 철저한 제자도 정치에서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리하여 “그릇된 교회정치를 비판한다.” ”믿는 자들의 공동체를 넘어서서 예수의 민중, 가난하고 병든 자들과 사귐을 나누고자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교회로 하여금 예수의 민중 안에서, 그 민중 옆에서 사회적인 자리를 찾고자 한다.”
한국적 상황 속에서 중요한 것은 한국교회의 정치의식이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정치현실과 관련하여 진정으로 복음적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올바른 정치신학은 신앙을 정치에 해소시킨다거나 교회를 정치운동에 해소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종교나 신학의 어용화나 정치적 변질화를 비판하고 기독자, 교회와 신학을 바른 처소에 가져다 놓는 것이다.
올바른 정치신학은 기독교가 지배자 이념이나 반공 이념과 동일시 되거나, 자본주의 이념이나 사회주의 이념과 동일시 되는 것을 비판하고 방지한다. 복음주의 신학은 정치신학을 통하여 교회와 신학이 가지고 있는 복음의 말씀을 정치적 영역을 향하여 해석하고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정치적 사역을 예시하고 이를 세례자 요한 처럼 예비하고 증언한다. 복음주의 신학은 정치신학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하여 개혁신학적 전통에서 정치신학적 사고와 십자가신학적 사고 그리고 평화의 신학을 배워야 한다.
2.개혁주의적 정치신학적 사고
개혁신학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신앙사상에서 출발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 삶의 총체적 영역 속에서 하나님이 절대적인 주권자요 왕으로서 통치하신다는 것을 믿는 신앙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개혁신학의 반성 영역은 단지 종교적 영역에 국한될 수 없다. 종교적 영역 뿐만 아니라 정치적 영역, 사회적 문화적 영역도 그리스도가 왕으로 통치하시는 영역이다. 하나님은 교회에서만 통치하실 뿐만 아니라 국가의 영역에서도 지고의 통치자로서 다스리신다. 교회와 국가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두 통치의 영역이다. 하나님은 교회에서는 신앙과 사랑으로써, 국가에서는 법과 정의로써 다스리신다. 개혁신학은 교회나 국가의 영역에서 야기되는 제도나 기구의 절대화, 우상숭배에 대해 십자가 신학적 비판을 수행한다. 여기에 개혁신학적 정치신학적 사고가 있다. 그것은 종교가 시민들에게 종교적 아편을 주지나 않는가? 국가가 자기의 체제를 절대화하여 국가 내지 민족이나 특정계층을 우상화하지나 않는가? 라고 비판적 질문을 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한 민족의 그 때 그때의 정치적 종교의 신화와 상징과 개인숭배 같은 것을 뚫고 거듭 새롭게 정치적 우상파괴 행위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정치신학은 개혁신학의 중요한 기능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교회의 예배행위와 교단적 행정 속에서만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신자가 위치하고 삶을 영위하는 구체적인 삶 속에서도 선포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영적인 주권자만이 아니라 우리 삶의 통전적 주권자이시기 때문이다. 개혁교회와 개혁신학은 종교적 우상(예컨데 1996년 10월 28일 예수재림사상과 이를 유포하는 거짓목사들) 뿐만 아니라 정치적 우상숭배(예컨데 1980년대의 군사정권시절 단군성전 건립시도)를 파괴하며 종교적 인간소외 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인간소외에 대해 투쟁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의 진정한 자유의 창조를 위해 노력해야한다. 정치신학적 사고는 신자와 교회와 신학을 정치적 종교의 우상숭배로부터 해방시키고 이 땅 위에서 고난받고 고통받고 억눌린 자들을 위하여 대리하여 서도록 하고 그들과의 연대 속에 있도록 한다. 이러한 개혁신학적 사고는 국가와 사회 안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일깨워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메시아 도래에 대한 선취의 경험을 갖도록 하며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세계적이고 우주적인 보편적 지평을 열도록 한다.
3. 정의로운 정치문화의 조건
정의로운 정치의 조건으로 다음 세가지를 말할 수 있다. 정의로운 정치인, 바른 사회제도와 깨어 있는 국민의 의식이 정의로운 정치문화를 창출한다. 목회자는 그의 목회와 강단에서의 선포를 통해서 정의로운 정치문화를 위한 조건을 형성하는데 기여해야 할 것이다.
1) 정치인의 인격 변화.
한국 정치는 정당이 선거에 참패하여 정권 창출의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될 때마다 정당을 해체하고 다른 이름의 정당을 만들어 왔다, 현재의 집권당인 새천년 민주당은 5년전에 출범하여 집권의 종료와 함께 정당의 이름을 내려야 할 만큼 인심을 잃어 버렸다. 그리하여 국민통합 21이 내세운 인물을 영입하고 정당의 이름을 새롭게 하여 출발하는 신장개업을 서둘고 있다. 이것은 후진국형 정당의 형태가 아닌가? 영국의 보수당과 노동당, 독일의 기민당과 사민당,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은 백년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정당의 당수는 새 인물로 바뀌지만 정당의 이름이 변하는 일은 없다. 이웃의 일본도 마찬가지다. 집권당인 자민당과 사회당에는 그 지도자가 바뀌지 당의 이름이 바꾸지 않는다. 정당의 이름을 마치 상인들이 이윤추구를 위하여 신장개업을 하듯이 하는 것은 정치를 상업화 하는 것이며 정치이념을 바꾸는 것이 된다. 선거참패를 하면 당수를 비롯한 당권자들이 책임을 지고 물러서고 당의 비주류를 비롯한 참신한 인물에게 당을 새롭게 이끌 기회를 주는 것이 바로 당의 정체성을 살려나가는 길일 것이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자신이 변화되어야 한다. 정치인의 인격이 변화되어야 한다. 아직도 우리의 정치인들 가운데는 전과자도 적지 않으며, 정치인들의 의정활동이란 모리패의 패걸이 싸움을 연상시키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정치는 정치를 맡은 사람들이 하는 만큼 이들이 먼저 윤리와 덕을 갖춘 인간이 되어야 한다. 정의로운 인격을 지닌 사람들이 정치를 하여야 한다. 따라서 여태까지 정치판에 종사해온 구태의연한 정치인들은 스스로 자기반성을 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를 받든지 그렇지 않으면 국민들은 저들을 선거를 통해서 정치권에서 추방시켜야 한다.
한국교회는 요셉, 다니엘, 다윗, 솔로몬, 느헤미아 같은 정치적 지도자를 육성해 내어야 한다. 공공 사회영역이 전적으로 선한 것은 아니더라도 그렇다고 전적으로 다 악한 것도 아니다. 신자들은 이러한 깨어진 사회 속에서 공공의 의를 세워나가는데 협력해야 한다. 여기에 신자들의 정치적 영성이 필요시 된다. 그것은 정치인으로서 공공의 일을 맡고 있는 자뿐에게만 아니라 모든 개혁신자들에게 문화적 명령으로 요청되는 사명이며 책임이다. 정치적인 영성이란 신앙의 눈으로 정치영역을 보는 방식이다. 한국교회는 교회 젊은이들이 일반 은총의 세계와 정치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신앙적으로 반성하고 기독교적인 관점을 실천하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화란의 칼빈주의자 카이퍼는 “정치적 영성은 복음전도의 일부분”이라고 역설했다.
2) 사회제도가 정의롭게 변화 되어야 한다.
한국의 정치풍토가 권위주의적이 된 이유는 국정운영을 법치(法治)가 아닌 인치(人治) 위주로 해왔기 때문이다. 왕조체제에서는 왕의 절대군주적 결단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인치가 주도했으나, 이제 우리는 왕조체제가 아니라 민주체제에 와 있다. 당 총재 한 사람에 의하여, 제왕적 대통령 한 사람에 의하여 정당과 사회와 정치가 좌지우지 되는 것은 전근대적 사고이다. 이제는 인치가 아니라 법치에 의하여 운영되는 정치문화를 형성해야 한다.
법치란 사회가 정의로운 법과 그 법을 정의롭게 집행하는 제도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것을 말한다. 아직도 우리 사회의 법은 지키지 못할 법이 적지 않으며 불필요한 법규가 많아서 그것이 부정부패의 요소가 되기도 한다. 기업의 소득세법은 선진국에 비하여 너무 높아서 정직하게 기업을 하면 파산할 수 밖 없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후진국형이라고 비난받고 있다. 법규가 너무 많아서 기업인들이 새로운 기업을 창업하는 데 엄청난 서류와 인가를 받아야 하는 조항들이 많다는 것이다. 여기서 뇌물과 부정부패의 관행이 들어설 여지가 놓여 있다. 우리 한국은 OECD 가입 국가 중 부패지수가 40위 수준에 해당할 만큼 아직도 법과 제도가 정의롭지 못한 사회이다.
3) 국민이 깨어 있고 정의롭게 변화 되어야 한다.
정의로운 정치는 법과 질서를 지키고 정의가 깨어 있는 국민에 의하여 만들어 진다. 오늘날 서구의 합리적 법과 정치제도도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시민주권 사상에 근거해서 봉건왕조를 무너뜨린 프랑스 혁명과 영국의 명예혁명에 기인한 것이다. 역사적인 경험을 통하여 정의로운 사회와 자유와 인권을 실현한 근대화된 선진사회에서는 제도적인 독재나 구조적인 부정부패란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선진사회의 시민들의 의식이 깨어 있기 때문에 독재자나 불의한 정치인이나 관료들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도 해방이후 짧은 민주주의 제도의 실행 가운데 시행착오가 많았다. 4.19 시민혁명, 군사혁명, 유신정권, 신군부정권, 문민정부를 거쳐 오늘에 이르는 한국정치는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졌다. 우리 정치풍토는 대통령을 5년마다 뽑는 단임제를 실천하여 민주제도가 정착되고 있으나, 집권자의 국정농락, 정치인들의 부정부패는 아직도 달라진 것이 없다. 아직도 아시아 지역에서 퍼져 있는 연고주의(cronyism)가 한국 정치에서도 지배하고 있다. 제도적으로 대통령 및 당 총재의 권한을 제한하는 장치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의 미래를 세속주의자들에게 내어 줄 수 없다. 한국교회는 자체적으로 기독교인인 지도자를 육성해야 한다. 그리고 선출된 지도자가 바르게 국정을 운영하고 있는지 감시 감독하여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복음주의적 정치의식을 활성화하여 교인들이 정치적 영성을 갖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개혁주의적 정치신학을 활성화하여, 참여적이고 비판적이며 변혁적인 정치문화가 형성되도록 노력을 기울려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국가제도와 정치인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며, 미래에서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 앞에서 인간의 권력과 제도가 최종으로 심판받는다는 종말론적 메시지를 증거하여야 한다.
김영한 교수(한복협 신학위원장/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장)
한복협 제1회 신학포럼 발제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