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곤의 구약인물로 보는 신앙 세계 (16)
모세를 통하여 수립된 "토라"(율법) 종교의 운명은 불레셋, 수리아, 앗수르, 신흥 바벨론 등에 의하여 찢기고 파괴되었으며, 성군 요시야의 대 종교개혁에도 불구하고, 요시야의 므깃도 전사(戰死: 기원전 609년)로 인한 급서(急逝) 이후, 끝없는 몰락의 운명에로 빠져 들었다. 그러나, 역사의 주(主)께서는 긴 바벨론 포로기의 수난(受難)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탕감(蕩減)해 주셨다는 매우 심도있는 신학적 각성(사 40:2)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예언자 이사야(제2이사야)가 "고난받는 야훼의 종"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사명과 기능을 말할 때"이방의 빛이 되어 야훼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사 49:6) 하는 것"이라는 말로 정의(定義)하였던 것은 바로 이러한 신학적 각성의 한 결과라고 보야야 할 것이다.이방의 빛으로서의 이스라엘이 우선적으로 취하여야 할 일은 무엇이었을까? 이것은 "고레스" 신탁(神託; 사 44: 24-28; 45:1-7)이 선포(기원전 538)된 이후, 파멸된 조국을 다시 일으키려는 포로 귀환민들의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였던 것이다. 그 때 당시의 상황에 대한 정보가 극히 제한되어 있으므로 자세하고 정확하게 이 물음에 대답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단지, 우리는 에스라 1장-6장에서 그 핵심사항을 인지할 수 있다. 그것에 의하면, "성전 재 건축(기원전 515)을 통한 새 이스라엘의 재건"이라는 것이었다.
왜 성전 재 건축인가? 역대기 역사서(에스라-느헤미야-역대기 상하)는 그것에 대하여 이렇게 대답한다. 하나님께서 예언자 "나단"을 통하여 그의 왕위(王位)의 영원한(!) 존립을 인정하고 보장해 주신(삼하 7장) 다윗 왕의 신정정치(神政政治: theocracy) 이념을 지속적으로 계승하기 위하여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신명기적 역사가가 신명기적 토라에 기초한 신정정치에 대한 이상(理想)을 다윗 왕조와 그가 기획한 예루살렘 성전 제의 공동체에 의하여 구현하려는 목적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신정정치의 두 축은 ①"모세의 법"과 ②"예루살렘 성전제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그러므로, 신정정치 이념을 통한 포로 후기 이스라엘 재건의 두 축이요 두 초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에스라의 역사적 의의는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에스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자"(스 7:6)이며 "율법 학자요 학자 겸 제사장"(스 7:11)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페르샤 왕 아닥사스다(Artaxerxes I[465-424BC] 혹은Artaxerxes II[404-358BC])의 허락을 받아 "예루살렘의 종교상황", 즉 성전 제의의 수립 여부와 그 제의공동체의 순결성(純潔性: reinheit)이 지켜지고 있는지의 여부를 조사하려고 예루살렘으로 왔던 것이다!(①458, 444BC ②397, 384BC).
신명기적, 예언자적 정신의 재정립이 예루살렙 성전의 재건과 함께 이스라엘 신정정치를 다시 세우는 초석이라는 확신을 가진 자가 "에스라"였다고 하겠다. 신명기적, 예언자적 정신의 그 재정립이란, 에스라에게 있어서는, 오경(페르샤 정부가 경전적 가치와 역할을 가진 책으로 인정해 준 것)이라는 "모세의 토라"를 "철저하게"(!) 실천에 옮기게 독려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또한 율법학자의 절대절명의 사명이다. 신정정치의 재 수립은 "모세 토라"를 철저히 실천에 옮기는 그 길 이외에는 다른 아무 대책이 없다 하겠다. 이것이 곧 신명기 신학자와 역대기 신 학자가 공유한 이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에스라"는 "제 2의 모세"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율법에 정통하였기 때문에 율법의 요구 사항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철저하게 가르치고 또 율법의 규정들을 이행할 행정관들과 재판관들은 임명하는 권한까지 행사하였던 특별한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이었다고 하겠다. 즉 모세를 통하여 확립된 초기 이념인 "토라"에 대한 새롭고도 철저한 준수를 통한 "신정정치," 즉 "토라 정치"에 의하여 이스라엘 재수립(再樹立)되기를 열렬히 추구하였던 인물이었다고 하겠다. 여기서 말하는 "토라"는 다분히 "신명기적"이다.
모세"토라"의 "신명기적" 성격은 "종교혼합주의"에 대한 철저한 배척이었다. "거룩한 전쟁"의 "헤렘"( :herem) 정신을 종교혼합주의에 대한 비판론에 적용할 만큼 야훼주의의 순수성과 정통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신명기다(신 20:16-18). 그 중에서도 가장 멀리하고 배척하여야 할 것은 가나안주의(바알주의)였다. 가나안주의는 접근조차도 하지 말아야 할 "타부"(taboo)였고 저주 받을 "아나테마"(anathema)였다. 이러한 신명기 법정신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서기 직전에(!!) 모세의 입을 통하여 설교형식으로 선포되었다는 그 의의가 여기 가나안 추방 70년 만에 그 유배지 바벨론으로부터 다시 돌아 와 새롭게 이룰 그 제2의 건국 벽두에 등장한 사람이 바로 "에스라"였다. 그리고 대제사장 아론의 16대 손(孫; 스 7:5)인 그의 손에는 "모세 오경"이 들려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유형론적으로 이미 제2의 모세였다고 하겠다.
따라서, 에스라의 귀국 결심은 "야훼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스 7:10) 한 그 결심이었다. 이 결심이 제2의 건국의지와 직결되었기 때문에, 율법에 대한 해석과 그 실천의지의 강도(强度)는 초기 이스라엘이 요단 강 동편 모압 평지에서 요단 강 서편을 바라보며 느낀 그 감격과 감동에 충분히 비견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감동과 감격, 그리고 충일하는 조국 재건의 소명감에 격렬한 불을 지른 것이, 이른 바,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들(가나안 사람, 헷 사람, 브리스 사람, 여부스 사람, 모압 사람, 애굽 사람, 아모리 사람 등등)과 가증한 일을 함께 행하고 그들의 딸들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았다는 소식이었다. 초기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 서면서 이스라엘의 전(全) 운명을 걸고 맹세한 그 약속, 즉 이방인을 멀리하고 야훼 [율법] 만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그 때문에 이스라엘로 하여금 70여년간 바벨론에게 국권을 빼앗기고 포로생활을 하게 한 그 엄청난 "죄"(스 9:4)가 무서운 악몽처럼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즉각 에스라는 이에 대하여 옷을 찢고 머리 털과 수염을 뜯으며 무릎을 꿇고 야훼께 손을 들어 참회의 기도(참회제)에 돌입하였다.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는"(스 9:6) 상황이었다. 이러한 그의 논조는 신명기적 문체가 지닌 그 참회적, 예언자적 경고 형식을 강하게 띄고 나타났다(스 9:7-10:11).
이에 대한 백성의 응답은 "가나안 사람들과 이방인 여인들을 끊어버리는 단호한 결단"의 응답으로 나타났다(스 10: 12-14).
제2건국의 이념적 이미지는, 그러므로, 혼합주의를 단호히 몰아내고 모세의 법에 기초한 다윗의 예루살렘 성전 공동체의 신정정치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강력한 야훼 신정정치 이념과 선민(選民)의 거룩성과 순수성의 지향은 후일 편협한 민족주의적, 율법주의적 유대교를 낳는 결과를 가져 왔지만, "토라"에 충성하고 충실하려는 에스라의 개혁운동의 시동은 모세의 그것과 비견할만 하다 하겠다. 이스라엘은, 이제! "열국의 빛"으로서 새로운 재 출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유대 율법종교[율법학자]와 새로운 제의 공동체[제사장]로서의 이스라엘 제2건국의 기초를 놓은 민족 재 출발의 정신적 지도자인 제2의 모세"였다.
김이곤(한신대, 신학전문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