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명섭 박사의 이야기를 통해 보는 한국교회의 역사[32]
1910년 경술국치부터 1919년 삼일운동까지는 한국교회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신앙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한국교회는 가장 혹독한 시련의 십자가를 져야했지만, 그 시련 앞에서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민족의 고난과 함께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걸머졌던 것이다.
그러기에 한국교회는 일제의 서슬 퍼런 칼날 앞에서도 움츠러들지 않고 민족의 복음화의 비전에 매진해 나갔다. 일찍이 헐버트 선교사가 선지자적 혜안으로 예언했던 그 외침이 한국인들의 심장 속에 메아리쳤던 것이다: “때가 올 것이다. 기독교가 끼친 문명의 영향이 일제의 탐욕과 억압을 쳐부수어 버릴 때가 오고야 말 것이다. … 일제는 한국의 사회 구석구석을 부패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기독교는 정의, 청결, 친절, 공익의 정신, 애국심, 협조, 그리고 교육을 위해 분연히 일어설 것이다.” (MRW, 1908. 3)
한국교회는 이러한 선지자적 외침을 기억하면서 일제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결코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억압 속에서도 교파 간의 연합사업을 통해 민족과 교회에 ‘하나됨’의 의식을 깨우쳤다. 한국교회는 초창기부터 연합사업에 적극적이었다. 이미 내한 선교사들은 1905년 ‘재한복음주의선교부 통합공의회’(GCEMK)를 조직하여 ‘하나의 예수교회’를 지향하기도 했다. 동시에 병원 및 학교, 주일학교공과와 찬송가, 그리고 교회신문 등 각 방면의 사업을 통합하거나 합동으로 운영할 정도였다. 그 중에서도 교회신문의 연합사업은 아주 활발했다. 1905년 7월 1일부터 <그리스도신문>이라는 제호로 두 교파의 연합신문이 나오게 되었고, 이후 <예수교회보>로 제호를 번경한 후 1910년까지 속간했다. 하지만 ‘통합공의회’는 각 교파의 정치적인 이유로 ‘하나의 교회’ 설립에 실패하고, 1911년에 그 명칭을 ‘연합협의회’로 바꾸었다. 동시에 “분열보다 연합에서 더 좋은 사업을 할 수 있고, 그 권한은 자문에만 있고, 동일한 신조와 치리기구 또는 동일한 예배에 대한 권한은 없는 것”으로 규정하여 통합에서 연합으로 후퇴하였다.
그런데 일제의 강점으로 한국교회의 이런 연합운동은 한때 위기를 겪기도 했다. 서로를 이간질하여 분열시키려는 일제의 교활한 정책에 한국교회가 잠시 말려들었던 것이다. 그 결과 장로교는 1910년부터 <예수교회보>란 제호로, 감리교는 1911년부터 <그리스도회보>란 제호로 각각 독립하여 교회신문을 발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1915년 12월에 <기독신보>(基督申報)가 초교파적인 하나의 신문을 표방하고 창간하면서 극복되었다. 조선예수교서회가 “각 교회의 통신은 초교파로만 한다.… 본 서회가 발행하는 예수교연합회보 외에 다른 회보는 발간치 못한다”는 내용의 신문발행 방침을 정한 후, 선교사연합협의회의 동의와 장.감 양측의 동의를 얻어 발간했던 것이다. <기독신보>는 1937년까지 속간된 기독교신문 중 최장수의 연합신문이다. <기독신보>의 창간 배경에는 일제의 탄압에 대한 한국교회의 대응이라는 차원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가 ‘개정사립학교규칙’이나 ‘포교규칙’ 등을 통해 한국교회에 대한 핍박을 노골화하면서, 한국교회가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이는 이후 3.1운동 어간에 <기독신보>가 몇 차례 압수당하거나 발매 금지처분을 당했던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맥락은 1918년 3월 26일에 창설된 ‘조선예수교 장감연합협의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제의 한국강점 후 한국교회의 연합운동은 점점 그 세력이 약해졌다. 일제가 교묘한 분열 정책과 탄압으로 이를 방해했기 때문이다. 결국 선교사들도 일제의 정치적 압력에 대응하기에는 힘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열린 1916년 “연합협의회‘에서 선교사들은 한국인 교회가 참여하는 새로운 형태의 협의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안건을 통과시켰다. 마침 서구 기독교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교파연합 및 합동의 분위기가 크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남장로교 선교사 벨(E. Bell)은 연합운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기도 했다. “최근처럼 교회 합동문제가 전 세계 기독교인들에게 크게 부각된 적은 일찍이 없었다. … 조화를 위해서라면 나 자신의 예배형식이나 교회의식을 비롯한 여러 가지를 포기하겠다. 세례 형식에 대해서도 개인적인 자유를 허용하겠다. … 감독주의 교회정치라도 받아들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이루어진다면 감독도 받아들이겠다”(KMF, 1919. 6.)
이후 연구와 논의를 거쳐 1918년 역사적인 ‘조선예수교 장감연합협의회’가 창립되었다. 이 회합에는 40명이 각 교파를 대표하여 참석했으며, 장로교의 김필수 목사가 초대 회장이 되었다. 이 장감연합협의회의 목적은 “1) 양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되는 정신을 증진케 하며, 친목하는 정의(情誼)를 돈독케 함. 2) 양 교회가 단행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경우에는 협력 진행하기를 힘써 도모함. 3) 양 교회가 교역상 경험과 지식을 서로 교환하여 그리스도의 사업을 확장함에 유조케 함” 등이었다. 처음에는 교파를 초월한 하나의 교회를 설립하려는 취지도 있었으나 현실을 감안하여 친목과 협력을 목적으로 한 협의체로 그 성격이 정착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한국교회는 연합운동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그리고 비록 기구적 연합이라는 한계가 있기는 했지만 일제의 감시와 억압 속에서도 ‘하나됨’을 지향함으로써 민족의 일치정신을 고취시키는데 기여했다. 이후 이 단체는 1924년 9월 24일에 조직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Korean National Christian Council)의 전신이 되었으며, 그 정신은 1946년 9월에 결성된 한국기독교연합회(NCC)로 이어졌다.
허명섭 박사 (서울신대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전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