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명섭 박사의 이야기를 통해 보는 한국교회의 역사[34]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신유사역을 강조해 왔다. 하지만 신유사역이 대중적 부흥운동 차원으로 승화된 것은 1920년대 들어와서 부터이다. 그 중심에는 김익두 목사가 서 있었으며, 이후 그는 한국교회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신유사역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이 부흥운동의 힘으로 3.1운동이후 무차별적으로 밀려든 세속주의와 사회주의의 거센 바람을 이겨낼 수 있었다.
김익두 목사의 신유사역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1919년 12월 경북 달성군의 현풍교회에서 일어났던 신유사건을 통해서이다. 당시 현풍교회에는 박수진이라는 거지가 있었다. 그는 막대기를 짚고 다녔기 때문에 막대거지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아래턱이 빠져 입을 다물지 못했기 때문에 음식을 씹지 못하고 물과 함께 음식을 부어 넘겨야 했다. 또한 늘 침이 흘러 턱받이를 하고 다녔다. 김익두 목사는 부흥집회에 참여한 이 막대거지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했다. 처음에는 별 효과가 없는 듯했으나 다음날에는 치료의 역사가 나타났다. 이에 사람들이 거지에게 곶감을 가져다 주면서 먹어보라고 하였다. 이 거지는 곶감을 맛있게 먹었다. 10년 동안 시달리던 병마에서 해방된 것이다. 김익두 목사는 그 거지에게 ‘은혜를 받은 자’라는 의미로 박수은(朴受恩)이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김익두 목사는 이를 계기로 권능의 사자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심지어 맥큔(George S. McCune, 윤산온) 선교사는 이것을 사진으로 찍어 미국에까지 보내기도 했다.
이후 김익두 목사의 신유사역은 “세계 3대 불가사이의 하나”로 여겨질 정도였다(기독신보, 1920. 9. 15). 따라서 김익두 목사가 살고 있는 신천에는 수많은 병자들이 몰려들었으며, “김 목사 보셨소”가 아침저녁 그들의 첫인사가 될 정도였다. 이후 그의 부흥집회에서 나타난 수많은 치유의 기적과 이적들은 임택권 목사의 [조선예수교의 이적명증]이라는 책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이적명증]은 김익두 목사의 사역에서 나타났던 신유현장을 직접 찾아가서 구체적으로 병이 나았는지를 확인하고, 그것을 사진으로 찍어서 신유가 단지 소문이 아니라 사실을 밝히려고 했다.
김익두 목사의 신유사역은 일반신문에서도 관심거리였다. [동아일보]는 1920년 5월 17일부터 부산진교회에서 열린 부흥집회를 소개하면서 “벙어리가 말을 하고, 앉은뱅이가 걸어 간다”고 썼다. 그리고 [동아일보] 7월 3일자에는 평양의 7개 장로교회가 연합하여 가졌던 집회가 소개되고 있다. 물론 강사는 김익두 목사였다. 6월 30일부터 시작된 평양집회에는 4-5천명의 남여가 모였는데, “평양 시내가 거의 빈 것 같았다. 이는 예수교가 평양에 들어온 이후 처음 보는 성황”이었다. 평양집회에서는 평양의 숭덕학교를 위한 모금이 있었다. 집회 중에 김익두 목사는 회중들을 향해 “넓은 평양에 한국인의 손으로 세운 중등학교 하나 없어 가지고 무슨 체면이 있겠느냐”고 도전했다. 이에 회중들이 앞을 다투어 헌금을 드리기 시작했다.
“어떤 무명씨는 즉석에서 숭덕학교를 위하여 1만원을 기부하였고, 그 다음에는 천원, 5백원씩 내어 놓는 이가 무수하며, 현금을 가지지 못한 부인들은 머리에 꽂았던 비녀와 월자 등속과 손에 끼었던 반지 가락지까지 기부하였는데, 월자가 칠백쌍이요, 금반지가 50여개요, 은장도가 20여개 기타 시계와 의복과 유기반상 별별가지 기부가 산같이 쌓여 현금과 합하여 계산하니 거의 6만원에 달한지라”
생각도 못할 정도의 엄청난 정도의 헌금이 드려졌던 것이다.
김익두 목사의 신유사역에서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믿음과 회개를 강조했다는 것이다. 김익두 목사는 안수기도를 하면서 먼저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할 것을 요구한다. 동시에 기도를 받기 전에 자신의 죄를 회개할 것을 요구했다. 한 예로 대구의 기생 김경애가 소변불통의 중병으로 1년 간 고생하다가 대구 남성예배당에서 열린 김익두 목사의 집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김익두 목사의 안수기도를 받으려고 했다. 하지만 김익두 목사는 이 여인을 보고 먼저 회개할 것을 요구했다.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한들 네가 회개치 아니하고, 네가 간절히 기도하지 아니하면 어찌 낫기를 바라겠느냐” 이 여인은 김익두 목사의 권면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면서 병 낫기를 간구하였다. 이후 이 여인은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고 병에서 치료받게 되었다. 이는 기복신앙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신유와 김익두 목사의 신유가 어떻게 다른지를 잘 보여준다. 치유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한 영혼이 하나님께로 합당하게 돌아서는 것이 그의 주된 관심사였던 것이다.
한편 김익두 목사의 부흥집회는 한국사회에 새로운 풍습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여인들의 헤어스타일을 변화시켰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여인들은 머리를 풍성하게 보이기 위해서 머리에 다리를 드리고 다녔다. 이것을 월자(月子)라고 한다. 이것은 조선시대 여인들의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즉 월자가 크면 클수록 사회적 신분이 높은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따라서 양반집 여인일수록 크고 멋있는 월자를 하고 다녔다. 그런데 김익두 목사의 부흥집회에서 은혜를 받은 여인들이 자신들이 가진 것 중에 가장 귀한 월자를 하나님께 바치고, 자신들은 쪽머리를 하고 다녔다. 원래 쪽머리는 기생이나 노복들이 하던 것으로 양반부인들에게는 체면이 크게 손상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은혜를 받은 여인들이 주를 위해 가장 귀한 것을 드리며 기꺼이 쪽머리를 했던 것이다. 김린서에 따르면 이런 부흥의 물결이 지나간 다음에 평양시내에 쪽머리가 유행했다고 한다.
허명섭 박사 (서울신대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전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