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만 되면 복주머니와 복조리 등이 제일 잘 팔리고, 토정비결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 그 원인은 어디 있는가? 그것은 우리 국민이 너무도 얄팍한 '복 콤플렉스'에 걸려 있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피상적인 복 관념이 교회 내에도 일반화되어 가는 경향을 우리는 보게 된다. 우리 크리스천은 복에 대해 바로 인식해야 한다.
옛날 헬라인은 행복이 지식 추구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인들에게 배척을 받아 마침내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을 당한 것도 그들의 복관이 현세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세네카는 최대의 행복은 무욕에서 찾았다. 평화주의자 러셀(Bertland Russel)은 "행복이란 고요한 생활에서만 기대할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행복이 적극적인 추구에서나 소극적인 무욕에서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보이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존재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한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맥스 쉘러(Max Scheler)는 "전등을 발명한 토마스 에디슨과 원숭이의 차이는 다만 그 양적인 차이뿐이다"라고 말한다. 원숭이는 배고플 때 한 송이 바나나로 만족할 수 있으나, 인간은 눈에 보이는 그 어떤 부귀나 영화로도 참 만족을 누릴 수 없다. 18세기 유럽을 호령하며 지상의 영화와 부귀를 한때 한몸에 누렸던 나폴레옹도, "행복을 사치한 부귀 생활 속에서 구하는 것은 마치 태양을 그림에 그려 놓고 빛이 비추기를 기다리는 것이나 다름없다"라고 하였다.
누군가는 행복을 찾는 자의 모습을 수풀 속에 앉을 자리를 찾는 한쌍의 애인들에 비교했다. 이곳에 자리를 정해 앉아보면 저곳에 더 좋은 잔디가 있는 것 같고, 막상 가서 거기 앉아 보면 차라리 먼저 앉았던 곳이 더 나은 것 같기 때문에 이리저리 옮기다가 시간만 낭비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우리 영혼에 참 만족을 주며 평안을 주는 것은 이 세상의 것에서 얻어질 수 없다. 우리가 흙에서 왔기 때문에 우리 육신은 보이는 세상의 것으로 기쁘게 할 수 있으나,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면 만족할 수 없다. 가톨릭에서는 특별한 크리스천에게만 '성자(Saint)'라는 칭호를 붙여준다. 그리고 일부 크리스천에게만 소위 '복자'란 칭호를 주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누구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면 약속한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 태도는 구약 시대에는 지상의 물질적 표현으로 나타났고, 신약 시대에는 산상보훈에 나타난대로 심령적인 것이다. 그러나 다함께 '하나님 나라'를 초점으로 하는 구속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김의환 총장(칼빈대학교)
[김의환 칼럼] 행복은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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