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명섭 박사의 이야기를 통해 보는 한국교회의 역사[38]
3.1운동은 기독교 신앙과 겨레 사랑이 어떻게 접목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여기서 기독교 신앙과 겨레의 문제는 하나가 되었으며, 겨레의 주권 회복은 곧 하나님의 뜻으로 인식되었다. 그러기에 한국교회는 여기에 모든 역량을 집결할 수 있었다. 겨레와 함께하고, 민족의 고통을 분담하는 교회상을 새겼던 것이다. 하지만 가시적으로는 3.1운동이 실패로 끝나면서 냉소적이고 허무주의적인 분위기가 사회전반에 만연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계례와 민족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교회의 신앙적 민족운동은 크게 두 흐름, 즉 현실 참여적 계몽운동과 대중적 부흥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전자는 3.1운동이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거기서 독립을 위한 민족의 주체적 역량을 발견한 기독교 지성인들에 의해 추구되었다. 그들은 민족의 낙후한 현실이 주권회복의 걸림돌이라고 생각하고, 그러한 영역들을 계몽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함으로써 독립역량을 강화하고자 했다. 1920-30년대 한국교회가 전개했던 농촌계몽운동, 문맹퇴치운동, 절제운동, 여성 계몽운동, 야학운동 등과 같은 기독교 농촌운동 및 사회운동은 이러한 정신에 기반을 두고 있다.
반면 후자는 겨례의 독립은 삼일운동과 같은 인위적인 노력이나 방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도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생각에서 표출되었다. 이러한 대중적 부흥운동은 길선주, 김익두, 이명직, 이용도 등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주로 대중들을 파고들면서 정신적 공황과 갈등으로 좌절과 낙담에 빠져있던 그들에게 하나님의 치유와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중들의 도덕성을 한층 고양시키며 사회저변의 변화에 긍정적으로 기여해 나갔다.
1921년 가을, 경성성서학원(서울신학대학교 전신)에서 촉발된 부흥운동은 좋은 실례이다. 부흥의 도화선은 당시 성서학원 교수였던 이명직 목사의 회개와 성결 체험이었다. 그는 3.1운동 이후 심각한 정신적 공황과 영적 탈진에 시달리다가 육체적 탈선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는 이를 계기로 금식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세례, 곧 하나님의 초월적 임재를 체험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강의실에 들어가 학생들에게 자신의 체험을 간증하면서, 성령의 감동을 따라 원하는 사람은 함께 새벽기도를 하자고 요청했다. 그러자 많은 학생들이 새벽기도에 참여했으며, 그 자리에 성령께서 크게 역사하셨다. 그와 동시에 성경학원 전체에는 신음하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로 진동하고, 교실은 순식간에 눈물바다가 되었다. 처음에는 갑반(甲班) 남학생들만 모였지만, ‘성령의 불’(聖火)은 순식간에 을반(乙班) 여학생들에게까지 번져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그곳에도 성령의 놀라운 임재가 있었으며, 그것은 “마치 모세의 장막과 솔로몬의 성전에 충만하게 임했던 하나님의 영광”과 같았다. 이렇게 되자 온전한 은혜를 얻기 위해 수업을 전폐하고 금식하며 기도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었으며, 의견을 따라 기도회가 15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때에 성령께서 친히 임하셔서 모든 사람의 행위와 마음속에 있는 죄악을 찌르셨고, “자복하고 회개한 죄악은 북악산보다 많았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경성성서학원 부흥운동의 특징은 성령의 역사와 통회 자복하는 회개였다. 성령의 역사로 내면의 죄악이 드러나게 되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내놓고 회개했던 것이다. 그래서 성서학원은 죄악을 회개하는 몸부림으로 가득하였다. 이런 회개는 단지 말로만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훔친 물건은 돌려주고, 미워했던 사람에게는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는 회개의 열매로 가득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죄에서 해방된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당시 이러한 회개의 열매가 어떠했는지는 회개하는 편지가 학원에서 밖으로 200통이나 발송되는 날도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물론 이러한 회개의 열매는 로마 카톨릭교회에서 말하는 공로사상과는 전혀 다르다. 로마 카톨릭에서 신자가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면 사제는 죄의 댓가로서 신자에게 보속을 치룰 것을 요구한다. 그러면 신자는 보속을 치루겠다고 약속하고, 그 조건에서 사죄의 선언을 받게 된다. 하지만 개신교에서 회개의 열매는 사죄의 조건이 아니라 사죄의 증거이다. 따라서 양자 사이는 분명하게 구별된다.
한편, 이 부흥운동의 불길은 먼저 40일 특별 새벽기도회로 모이던 아현교회를 태웠다. 아현교회는 1922년 1월, 40일 새벽기도회를 열고 모여 출애굽기를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셋째 날부터 부흥이 일어났다. 각각 성령의 찔림을 받아 여러 가지 말로 못할 죄를 통회 자복했으며, 어떤 사람은 죄악의 고통을 견뎌내지 못하고 기절할 정도로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이 부흥운동의 불은 그 직후에 열렸던 전국교역자 수양회도 휩쓸었다. 이때 전국에서 올라왔던 교역자들이 충만한 은혜를 받고 각자의 곳으로 흩어졌다. 그들은 각자의 교회로 돌아가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면서 부흥의 불은 전국으로 파급되었다. 그래서 이명직은 한국교회가 이때부터 비로소 전국적으로 새벽기도회를 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성결교회 신자들이 새벽기도회에서 은혜를 받는 것을 보고, 다른 교파들도 새벽기도회를 갖게 되어 전국적으로 전 교파적으로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이 부흥운동을 통해 성결교회는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것은 이 부흥운동이 “성결교회를 영적이나 역사적으로 개조하는 부흥”이었을 뿐 아니라 “이후 학원에는 사악한 구름이 벗겨지고, 새로운 능력으로 충만한 용장과 군사들이 많이 일어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이명직 목사는 이렇게 평가한다. “과거 5-6년 동안 흑암을 지나온 성서학원은 이때에 비로소 면목이 새롭게 되었다. 그리고 이 부흥은 실제로 일부만의 부흥이 아니라 성결교회를 영적이나 역사적으로 개조하는 부흥이었다. 이 부흥으로 말미암아 수양생뿐 아니라 다수의 교역자도 비로소 회개하고, 거듭나고, 성결의 은혜를 실제로 받게 되었다. 그래서 이 불길은 지방 각 교회에 파급되었으며, 다른 단체에까지 중대한 영향을 주게 되었다. 성결교회의 참된 부흥의 운동은 이때부터 비로소 일어나게 되었다.” (<약사>, 40)
허명섭 박사 (서울신대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전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