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명섭 칼럼]한국교회와 6·10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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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명섭 박사의 이야기를 통해 보는 한국교회의 역사[44]

				▲허명섭 박사 (서울신대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전임연구위원)
▲허명섭 박사 (서울신대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전임연구위원)

기독교는 3·1운동을 주도했던 세력이다.‘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16인이 기독교인이었다는 가시적 차원뿐 아니라 기독교는 그 운동의 조직화·대중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3·1운동의 기세가 꺾이게 되면서, 이후 민족운동 진영은 거의 와해되었다. 주요 지도급 인사들은 옥에 갇혔거나 아니면 해외로 망명했다. 학생들의 시위도 1920년에 들어와 현저히 줄어들었다. 1920년 3월에 시내 몇몇 학교에서 3·1만세운동 1주년을 맞아 시위가 있었으나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이것이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였다.

하지만 민족의식을 갖고 있던 젊은 학생들은 열병을 앓고 있었다. 속에서 타오르는 애국심을 밖으로 표출시키지 못해서 오는 병이었다. 그런데 1926년 4월 순종이 승하했다. 비록 아무런 실권은 없었지만 순종은 조선의 마지막 왕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7년 전 고종의 장례를 계기로 일어난 3·1만세운동을 경험한 바 있던 일제는 혹여 순종의 인산(因山)을 맞아 재발할지 모르는 만세시위를 대비하며 바짝 긴장했다. 일제의 예측대로 6월 10일 거행된 장례를 계기로 학생들 주도의 만세시위가 서울과 지방 몇몇 도시에서 일어났다. 이것이 이른바 6·10만세운동이다. 3·1운동에 비하면 규모나 영향력이 적었지만, 이 운동은 학생중심의 민족운동이었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그런데 3·1운동을 주도했던 기독교는 6·10만세사건에 거의 관계하지 않았다. 교회조직이 동원되지도 않았으며, 교계 지도자들도 이 사건에 대해 침묵을 지켰다. 이런 상황에서 혼자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친 신학생이 있었다. 그가 바로 경성성서학원(서울신학대학교의 전신)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천세봉(千世鳳)이었다.

천세봉은 1904년 3월 경북 군위군 소보면 보천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는 17세 되던 해인 1920년 상경하여 3·1운동의 진원지였던 보성중학교에 입학했다. 거기서 그는 ‘애국에 불타는 심정’으로 고민하다가 신경쇠약증에 걸리게 됐, 그만 영어시험에 낙제하고 말았다. 이에 그는 이듬해 양정고등보통학교로 옮겼고, 숙소도 자연히 종로에서 북아현동으로 옮겼다.

아현동으로 이주하면서 그의 인생에는 새로운 전기가 마련됐다. 그가 거처하던 하숙집 바로 옆에 동양선교회가 세운 경성성서학원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기독교를 “서국이단”(西國異端)으로 여기고 기독교 신자들을 멸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1921년 초, 기독교에 대한 그의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일어났다. 성서학원이 5층짜리 교사를 신축하고 개최했던 ‘낙성기념 전도집회’에 참석했다가 기독교 개종하게 된 것이다. 그때 무엇보다도 그를 감동시킨 것은 신자들이 기쁨으로 찬송을 부르는 모습이었다. 자신은 지독한 염세주의에 빠져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한 채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데, 기독교인들은 똑같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자신과는 전혀 다르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에 기독교로 개종했다.

하지만 그가 단순히 신앙적인 동기로만 개종했던 것은 아니다. 현실적인 동기 또한 크게 작용했다. 즉, 그를 염세주의에 빠지게 만든 민족문제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기독교에서 찾았던 것이다. 그는 “인생문제, 국가문제의 해결은 오직 생명의 종교인 기독교”에만 있음을 자각했다. 그리고 “조국 광복도 하나님 전에 기도하면 가능한 일”로 생각했다. 그래서 생명의 복음에 헌신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이후 그는 1925년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했다. 그리고 독립만세사건은 이듬해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을 계기로 일어났다. 그날 아침 천세봉은 손수 제작한 태극기에 ‘근화신국만세’(槿花神國萬歲)라는 글을 써 넣었다. 처음에는 학원생들을 동지로 포섭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동향 친구인 김영수도 “종교인이 그런 정치운동을 하는 것은 매우 옳지 않다”고 하면서 만류했다. 결국 천세봉은 단독거사를 결정했다.

천세봉은 태극기를 숨기고 오간수교(五間水橋) 아래의 군중들 틈에 끼어 순종의 장례행렬이 오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장례행렬이 오간수교를 통과하는 순간 천세봉은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수차례 외쳤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행렬이 흐트러지면서 소요가 일어나고 구경꾼들도 술렁거렸다. 하지만 그가 이내 일본인 순사에게 체포되면서 술렁거림은 금방 사라지고 말았다.

동대문경찰서로 연행된 천세봉은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고, 기숙사를 수색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감사록>(感謝錄)이 증거물로 제시됐다. 이는 1923년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할 때 학교 당국에 제출했던 신앙간증문으로 보인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내용이 있었다. “나의 사상은 과도기에 있다. 20세기 조선 청년인 나는 곧 애국사상인 조선 고대 물질과 정신 두 방면의 문명을 회고하고 현대의 패망을 목격하면서, 나의 사명이 중차대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로 인해 번민은 극도에 달하고, 나는 염세주의자가 되어서 세상을 비관하고 있었다. 한편의 마음은 죽어도 동족을 위해 가치 있는 죽음을 하려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결국 그는 1926년 7월 7일 공판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물론 천세봉은 이번 거사가 “신앙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선전하려는 목적으로 한 것이지 결코 정치상의 목적을 갖고 한 일은 아니다”라고 항변하기도 했다. 즉 “기독교만이 조선을 구한다는 일념”에서 비롯된 신앙행위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후사정을 살펴보면 이 사건에는 그의 민족 사랑의 숨결이 깊이 개입되어 있었음을 쉽게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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