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명섭 칼럼] 비록 생명을 잃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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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명섭 박사의 이야기를 통해 보는 한국교회의 역사[46]

				▲허명섭 박사 (서울신대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전임연구위원)
▲허명섭 박사 (서울신대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전임연구위원)

어떤 사람이 배에 올라 노를 젓기 시작했다. 한참 노를 저은 후에야, 그는 배가 아직도 선착장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이에 일어나 후미로 가보니 배가 선착장에 묶여 있었다. 지금까지 노를 저은 것이 헛고생이었다. 칼을 꺼내 밧줄을 끊고 노를 저으니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앙의 여정은 예수님과 함께 떠나는 모험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을 신뢰하며 아직 가보지 못한 길, 살아보지 못한 세상을 향해 떠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묶인 것을 풀거나 끊어내야 한다. 선착장에 묶여 있는 배는 제 아무리 노를 젓는다고 해도 앞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전라도 지역의 최초 세례식은 1897년 여름에 있었다. 유씨 부인은 이때 세례 받은 다섯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부유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유씨 부인은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만 둘 낳았기 때문에 거의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사회에서 여성의 가장 큰 의무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아들을 낳는 것이었으며, 이 일을 이루지 못할 때 여인은 무용지물로 취급되었다.

그런데 이 가련한 여인에게 예수의 복음이 들어왔다. 여선교사 테이트(Lewis B. Tate)의 집을 드나들면서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남편에게 그 사실을 밝힐 수 없어 단지 서양 사람의 집을 구경 다닌다고 둘러댔다. 하지만 계속 거짓말을 계속 할 수 없다는 마음이 들었다. 예수께서 당신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거짓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래서 유씨 부인은 어느날 “어디 갔었느냐”고 추궁하는 남편에게 여선교사의 집에 “예수의 가르침을 배우러 갔었다”고 대답했다. 이에 남편은 분노하며, “여자가 배운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암소 같이 영리한 짐승도 배울 수 없는데, 여자 같이 어리석은 것이 무엇 때문에 배울 생각을 하고 있단 말인가?”라고 하며 사정없이 때렸다. 그리고 “아들도 못 낳는 것이 그나마 목숨이라도 부지하고 싶으면 남편의 말이라도 잘 들으라”고 하면서 “다시 가기만 하면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이후에도 남편의 구타와 혹독한 박해는 계속 되었다. 하지만 유씨 부인은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유씨 부인은 두 딸에게 각각 “큰 보배” “작은 보배”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등 한층 성장한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조선사회에서 대부분의 여인들은 자신의 이름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설혹 이름을 가졌다 해도 그 이름이 불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며, 오히려 “이 부러진 여자” “코에 사마귀가 있는 여자” 등과 같이 외모나 신체적인 특징에 따라 그 이름이 정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아들을 낳은 후에는 “아무개의 엄마”로 불렸다. 그러므로 유씨 부인이 자신의 딸들에게 축복된 이름을 붙여준 것은 매우 아름답고 놀라운 신앙고백적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유씨 부인이 예수님께서 백부장 야이로의 어린 딸을 고치신 사건(막 5:35-43)을 통해, 딸들의 생명도 예수님의 보시기에 값진 생명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행한 일이었다.

얼마 후 유씨 부인은 모진 핍박을 이겨내고 세례를 받게 되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얻은 기쁨이었다. 그리고 세례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셔서 아들도 낳게 되었다. 그런데 이 아이가 그만 급성전염병인 단독(丹毒)에 걸리게 되었다. 당시 민간치료에서는 단독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돼지를 잡아 그 위에 아기를 눕혀야 한다고 했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그렇게 했다. 하지만 나을 리가 없었다.

이에 유씨 부인은 의료선교사 잉골드(Mattie B. Ingold)를 불렀다. 그는 “이상한 침대” 위에 뉘여 있는 아기를 꺼내서 치료해 주었다. 유씨 부인은 이제야말로 남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축복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편의 마음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오히려 내심으로 아이가 엄마와 더불어 예수의 가르침을 받지 않을까 염려했다.

유씨 부인은 신앙생활의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과거에 유씨 부인은 자신이 제사를 드리지는 않았지만 제사를 위한 음식 장만은 했었다. 제사에 직접 참여하지만 않는다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을 배우면 배울수록, 기도하면 할수록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일이 마음에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이에 그녀는 남편에게 이제부터는 예수님만을 섬기기로 결심했다고 하며 제사와 관계된 일체의 일에서 손을 끊겠노라고 선언했다. 이 말을 들은 남편은 기절할 정도였다. 그것은 공개적인 반역행위였던 것이다.

남편은 부엌에 가서 칼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칼을 높이 쳐들고 아내에게 제사준비를 하라고 하면서 말을 들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유씨 부인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원한다면 나를 죽이십시오. 당신은 나의 몸을 죽일 수 있을런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나의 영혼을 죽이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결코 제사 준비를 하지 않겠습니다.” 그녀의 얼굴을 비록 생명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주님을 충실히 증거하겠다는 흔들리지 않는 결의로 환히 빛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칼을 들고 한참 동안 서 있던 남편은 결국 칼을 내던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도망치듯 집에서 빠져나갔다. 물론 그렇다고 유씨의 남편이 곧바로 신앙으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남편은 자신의 두 딸과 아들을 기독교학교에 보내 교육받도록 허용했으며, 큰 딸은 예수 믿는 남자에게 출가시켰다. 유씨 부인은 밖에 나가서 전도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자신의 집에서 복음을 지키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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