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명섭 박사의 이야기를 통해 보는 한국교회의 역사[52]
한국교회는 외적인 도전에 대해서는 현실참여적 계몽운동을 통해 대응해 나갔고, 내적인 도전에 대해서는 교리적인 논쟁이나 정치적인 제제 등을 통해 성서의 권위를 확고히 하려고 하였다. 그 와중에 ‘성서의 권위’라는 대명제 하에 어느 정도 융통성을 가졌던 한국교회의 성서관은 이후 점차 경화되어 근본주의적 성서관으로 기울어져 갔다.
한국교회에서 성서의 권위에 대한 본격적인 논쟁이 시작된 것은 1920년대 중엽이다. 그 선두에는 캐나다연합교회 소속의 스코트(William Scott) 선교사와 미국과 일본에서 자유주의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몇몇 한국인들이 있었다. 스코트는 1926년 함흥에서 열린 교역자 연수회를 인도하면서 ‘새로운 신학’을 이해시키고자 노력했다.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은 큰 잘못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 아닌 것도 포함되어 있다. 문학적 오류는 물론, 다수의 역사적 오류와 과학적 오류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장로교회에서는 큰 물의가 빚어졌고 자유주의신학은 극심한 반대에 부딪치면서 그 기세마저 꺾이는 듯했다. 하지만 자유주의신학자들은 그들의 신학을 학생들에게 계속 가르쳤고, 그 와중에 몇몇 교회지도자들 또한 새로운 신학적 견해에 긍정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유학하고 돌아온 그룹들이 교수직과 중요한 교회들을 맡으면서 자유주의신학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한국교회는 1930년대 중엽에 이르러 또 다시 성서의 권위 문제로 소용돌이를 겪게 되었다.
1934년의 장로교 총회에는 성서의 권위와 관련된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되었다. 하나는 서울 남대문교회 김영주 목사의 ‘창세기 모세저작권 부인사건’이며, 다른 하나는 성진중앙교회 김춘배 목사의 ‘교회 내의 여권(女權) 발언 사건’이었다. 총회는 이에 대해 치리하기로 결정했으나 둘이 공적으로 사과함으로써 이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또한 이 총회에서는 또 다른 중요한 사항이 거론되었다. [아빙돈 단권 성경주석]에 관한 것이었다. 감리교가 선교 50주년을 기념하여 번역 출판한 이 책에 송창근, 김재준, 채필근, 한경직 등 몇몇 장로교 목사들이 관여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해외 유학파들로 한국 장로교회를 대표하는 학자들이었다. 하지만 그 책은 한국 장로교회의 성경관과는 맞지 않았으며, 총회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 박형룡은 그 책을 “모든 자유주의 사상의 집대성”이라고 평가하며, 기독교의 기본진리를 왜곡하는 책이라고 공격했다. 총회는 박형룡의 보고와 길선주 목사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 책을 구독하지 않도록 결의했다. 정치적이며 제도적인 장치를 통해 자유주의신학의 확산을 저지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성결교회는 한국교회의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 심히 우려했다. 이명직 목사는 “금일에 외국으로부터 유입되는 악(惡) 사조는 점점 팽창하여 가고 있다. 잡지 신문으로, 강단교단에서, 심지어 소위 신학교의 강단에서까지 성경에 대하여 냉담하고, 비평 뿐이다. 믿으라고 하는 것보다 믿지 말라고 가르치는 편이다. 이 어찌 한심치 않은가?”라고 개탄할 정도였다[활천, (1937. 4): 2]. 본래 성결교회의 신앙은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소박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소박한 신앙이 소위 신신학과 고등비평 등에 의해 위협을 당하게 되자, 그것들을 “교회를 파괴하는 악마의 계략”으로 보고 거기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려고 노력하였다[활천, (1932. 12): 2-3].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34년부터 거의 매년 계속 되어온 성서신앙부흥대회였다. 경성성서학원이 주최한 이 대회는 소위 ‘신신학운동’이 발사한 어뢰에 맞아 비틀거리는 한국교회를 대상으로 ‘참된 성서적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그러한 기독교의 확장을 위해 모색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이명직 목사는 이렇게 피력한다. “우리는 특히 성서신앙대회라는 명칭을 붙여서 모든 이단사설, 그릇된 신학, 소위 고등비평 등에 향하여 싸우기 위하여 있는 회합이었다. … 혹이 이러한 일들을 볼 때에는 근일 지식이 많아져서 이지(理智)가 밝아져서 바로 해석하는 것으로 알기 쉬우나 실은 금일에 비로소 발견된 말이라거나 학설이 아니다. 대개 비평자들은 중생의 경험이 없는 맹목이다. 그 영성으로 말하면 맹목이다. 고등비평은 마치 모든 사람은 다 보는데 자기만 보이지 아니한다고 말하는 소경의 소리와 같은 것이다. 우리 성서신앙대회는 그 사명이 미신을 타파하고, 비평자에게 광명을 주고, 성서의 권위를 증명하고자 함이다”[활천, (1940. 7): 2-3].
따라서 이 대회의 모임 장소도 주로 YMCA 강당, 조선일보 강당과 같이 일반 신자들이 비교적 접근하기 쉬운 곳으로 정해졌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참된 성서적 기독교에 대한 지식을 섭취할 수 있도록 돕자는 취지였다. 그리고 이 대회의 강사로는 성결교회의 이명직, 이건, 박현명 목사 등을 비롯하여 장로교의 김익두, 채필근 목사, 감리교의 변홍규 목사 등이 참여하여 다음과 같은 주제들이 심도있게 다루어졌다. “성서에 과연 오류가 있나”, “성서와 동양윤리”, “성서와 국가”, “성서와 고고학”, “성서와 예언,” “인생의 요구와 성서,” “시대상과 성서”, “과학과 성서” …. 또한 이 대회는 매회 800-1,500여명 정도가 모일 정도로 매우 큰 관심과 호응 속에 치러졌다. 결국 이러한 노력들이 모여 오늘의 성서한국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으며, 그러한 신앙은 하나님께 대한 소박한 헌신으로 이어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