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린도교회는 은사가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기와 질투, 분열과 당쟁을 일삼는 미성숙한 교회였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 이유를 바울 사도는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될 뿐이다” 그것이 제아무리 귀하고 아름다운 은사라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인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거예요.
왜 그럴까요?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은 곧 인간이 사랑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이며, 사랑할 때만 참 인간이 될 수 있고, 인간으로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에게 사랑이 없다면, 인간은 모든 의미와 가치를 잃게 될 것입니다.
저는 2차대전 중 태평양에서 조난당했던 해병들의 이야기를 읽은 일이 있습니다. 적의 폭탄을 맞고 서서히 침몰하고 있는 전함에서 자신들의 목숨을 구출하기 위한 병사들의 노력은 가히 필사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배 안에 있는 모든 물자와 식량들이 물 속으로 던졌습니다. 다음에는 배 안의 모든 기구들, 의류와 소지품, 마지막으로 비상 식량까지 내던졌습니다. 그러나 그 병사들이 침몰될 때까지 끝까지 움켜쥐고 놓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가족과 애인의 사진과 편지였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 죽을 수 없다,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끈질긴 사랑에 대한 집념, 이 끈끈한 사랑의 집착을 바라보면서 저는 “인간의 근본은 사랑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고 말합니다. 초대교회에 통용된 방언은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베드로가 히브리말로 설교하는데 세계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각기 자기 나라 말로 알아듣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전혀 외국어를 배우지 않은 베드로가 한번에 여러 나라 말을 할 수 있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닙니까? 또 하나는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방언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한 하늘 나라 언어로 하나님과 밤을 새워 대화하며, 기도하고 찬미하는 일이 얼마나 놀랍고 매력적인 일입니까?
가장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말은 천사의 말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이 세례 요한을 잉태했을 때, 마리아가 예수님을 수태했을 때, 천사 가브리엘과 대화를 하게 됩니다. 우리가 가브리엘과 같은 천사와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영광이겠습니까? 헬라 사람들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열광케 하는 웅변을 천사의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링컨은 게티스버그의 웅변을 통해서 미국 남북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처칠은 던커크의 웅변으로 영국 국민이 실의와 좌절을 딛고 일어서게 만들었습니다. 웅변의 힘이란 이렇게 놀랍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링컨이나 처칠이 자기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천사의 말이 아니라, 사랑이었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을 복음화한 것은 리빙스톤의 웅변이 아니라 그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를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된 원주민들이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우리는 리빙스톤이 무슨 말을 했는지를 잘 기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우리를 지극히 사랑했다는 이 사실만은 결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시는 것을 보고 유대인들이 뭐라고 말한 지 아십니까?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이 주님의 사랑이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를 살려낸 것입니다. 한번은 무디(D. L. Moody) 목사님이 전도집회를 마치고 인사를 하는데, 한 영문학 교수가 하는 말이 “목사님 설교는 훌륭한데 설교집을 보니 문장이 50군데나 틀렸더군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무디 목사님은 “저는 문법이 맞지 않는 설교를 가지고도 수천, 수만의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했습니다. 교수님은 그 정확한 언어로 몇 사람이나 그리스도께 인도하셨습니까?” 그는 한 사람도 전도한 일이 없었습니다. 무엇이 이 엄청난 차이를 가져다 준 것입니까? 그것은 한 영혼에 대한 사랑입니다.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알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우들에게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히 예언을 하라”고 했습니다. 어느 시대나 최고의 뉴스, 최고의 베스트셀러는 미래를 예측하고 예언하는 것들이었습니다. 만일 미래를 정확하게 예언할 수 있는 예언자가 있어 앞으로 있게 될 세계의 모든 비밀과 지식을 말하게 된다면 그가 받게 될 세계적 관심과 명성은 대단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그러한 예언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발람이라는 예언자를 잘 알고 있습니다. 발람은 유명한 예언자였습니다. 심지어 그는 “구원자인 메시아의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리라”고 예언한 사람입니다. 그의 예언은 정확했습니다. 그런데 요한 계시록은 “발람은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다(계 2:14)”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발람은 뛰어난 예언자였으나 사랑 때문에 예언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출세와 욕심을 위해서 예언했습니다. 예언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일이기에 무엇보다도 그 동기가 중요합니다.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예언하느냐” 말입니다. 만일 사랑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면 그야말로 종교 사기꾼이 되고 말 것입니다. 반면에 사랑 때문에 예언한 선지자들은 절망에 빠진 민족에게 희망을 주고, 위기에 처한 나라와 민족을 구해 냈습니다.
또한 바울 사도는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고 말합니다. 믿음이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도 없고,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여기에서 말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의 능력으로 모든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은사를 말합니다. 실로 우리 신앙인에게는 “자신의 힘으로나 능으로 되지 않는 일도, 오직 신앙으로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불가능에 도전하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신앙이 태산같은 인생의 역경을 극복해 내고, 인생을 승리로 이끌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설령 우리가 이렇게 위대한 믿음을 가지고 역사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사이비 믿음이지, 참 믿음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믿음이 사랑을 위해서 봉사할 때, 자비를 베풀게 되고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내는 참 믿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제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대교회 사역의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가 구제하는 일이었습니다. 초대교회가 집사를 세우게 된 동기도 헬라파 과부들이 구제에 빠지게 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초대교회가 이렇게 구제에 힘쓴 것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하나님은 편견을 가지고 계신다고 할 정도로 과부와 고아 등 가난한 이들에 대한 돌봄을 요구하신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토록 구제하는 일이 중요하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고 말합니다. “사랑 없이 어떻게 구제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시는 분도 계실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사랑 없는 구제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예수님 당시 구제에 가장 열심이었던 사람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나팔을 불어대면서 구제사업을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자선 바자회를 하는 것처럼, 바리새인들은 구제를 연중 행사로 하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구제 행사장에는 많은 인파들이 모여들었고, 구제함에 돈을 넣을 때마다 금액이 공개되었고 그 때마다 팡파레가 울려 퍼졌습니다. 물론 큰 돈을 넣을 때에는 더욱 요란하게 팡파레가 울렸습니다. 구제행사가 끝나면 참석자들에 의해서 거액 기부자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그들은 영웅시되어 지역 대표나 원로로 뽑혀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거액 구제자가 아니더라도 바리새인들은 공개적으로 구제에 참여함으로써 자신들의 경건과 의를 과시하며 위세를 부렸습니다. 이처럼 당시 구제활동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이름을 알리고 출세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습니다. 이러한 구제의 실상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마 6:3~4)”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느 전도자가 길을 가다가 구걸하는 걸인 하나를 만났습니다. 주머니를 뒤졌지만 한푼도 없는 거예요. 그러자 걸인에 대한 애정 때문에 그냥 지나쳐버릴 수가 없는 거예요. 전도자는 걸인의 손을 꼭 쥐어주면서 “오 형제여, 준비된 돈이 없구려, 미안하오. 부디 용기를 잊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긍휼을 입으시오”하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걸인은 눈물을 글썽이며, “당신은 지금까지 나에게 적선한 모든 이들 중에 가장 소중한 선물을 주었소”하고 눈시울을 붉히며, 울먹이는 것이었습니다. 구제는 사랑이 생명입니다. 구제에 사랑이 있을 때 그 구제는 위로가 되고, 사랑이 없으면 상처만 줄 뿐입니다. 교회사가인 F. B. 마이어(Meyer) 교수는 “초대교회의 구제는 먹을 것을 뒷문으로 건네주는 차가운 의무수행이 아니라, 그들을 자신의 식탁에까지 초대하는 형제애의 표현이었다”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이러한 사랑이 있는 것입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 없는 구제로 감사한 마음 대신에 치사한 부채감과 모멸감으로 상처를 입고 있습니까?
바울 사도는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고 말합니다. 순교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헌신의 최고봉이요, 헌신의 절정입니다. 그렇기에 요한계시록은 “순교자는 하나님 나라의 별과 같다”고 극찬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이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이 약속되어 있다”고 합니다. 고린도교인들은 순교자를 신앙의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내 몸을 화형장에 내던져 순교의 제물이 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고 말합니다. 종교란 영웅을 만들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주변에 하나님의 사랑과 돌봄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지극히 적은 소자에게 찬물 한 그릇 대접하는 친절과 사랑인 것입니다.
한 집사님이 자기 교회 목사님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예수 믿은 지가 10년이 넘고, 성경공부도 하고, 전도훈련도 받았는데, 아직 한 사람도 주님 앞으로 인도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도 이웃집 한 자매에게 전도하려 했지만 아무 성과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러자 담임 목사님 하는 말이 “그것은 아마도 집사님의 눈에 사랑의 눈물이 메말라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전도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이랍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가 “울며 씨를 뿌리는 자가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된다”고 말했던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울며 씨뿌려 본 일이 있으십니까? 사랑으로 씨를 뿌리지 않고는 기쁨으로 단을 거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전도자에게도 가장 필요한 것은 한 영혼을 향한 불타는 사랑입니다.
“인생에게서 사랑을 빼면 0, 곧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이 없는 인생은 헛것이요, 무가치할 뿐이다. 사랑이 없다면,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은사가 헛것이 되고 말 것이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사랑이 하나님의 본질이요, 사랑이 인생의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모든 문제의 유일한 해답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이 다 허무하게 끝나버리기 전에 사랑을 붙드십시오. 여러분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사랑을 붙드세요. 사랑을 말입니다. 이 세상에 사랑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도, 십자가를 지신 것도 이것을 깨닫게 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금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직 한 가지 뿐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사랑의 승리자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