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명섭 칼럼]십자가의 사람, 신석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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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명섭 박사의 이야기를 통해 보는 한국교회의 역사[58]

				▲허명섭 박사 (서울신대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전임연구위원)
▲허명섭 박사 (서울신대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전임연구위원)

한국의 기독교파 가운데 일제 말 훼절과 변절의 역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교단은 거의 없을 것이다. 대부분이 그 소용돌이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감리교는 다른 교단에 비해 일찍이 일제에 순응하는 자세를 보였다. 한 예로, 1936년 4월 기관지 <감리회보>에 수록된 “신사참배는 종교행위가 아닌 국민으로서 의무를 행하는 것이다”는 학무국장의 통첩문이 그것이다. 이는 이후 신사참배 거부자들을 설득하는 논리가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역사 속에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정금같은 신앙의 사람들을 남겨 놓으셨다. 그들은 형극의 길이 그들 앞에 놓여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래요, 그렇게 할게요!”라고 차마 말할 수 없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역사는 항상 그런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음을 보여준다. 감리교의 신석구 목사(1875-1950) 또한 그런 전형이라고 할 것이다.

충청북도 청주 출신으로 독실한 유교 신봉자였던 그가 기독교에 입문한 것은 33세 되던 1907년이었다. 유교와 기독교에 대한 오랜 비교 성찰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후 선교부가 운영하는 병원 일을 돕다가 리드 선교사로부터 “의학 공부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정식 제의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잃어버린 백성을 찾는 전도가 참된 구국의 길이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소명임을 깊이 깨닫고 부와 명성이 보장되는 의사의 길을 버리고 전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그는 시류에 영합하기보다는 ‘못난이 목회’를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올곧은 사역자의 길을 걷고자 했다.

이런 모습은 일제 말 한국교회가 안타깝게도 굴절과 변절로 함몰되며 자승자박(自繩自縛)의 역사를 남길 때 그가 보여준 행보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2년 8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그는 이후 시국에 중대한 변화가 생길 때마다 예비검속이란 명목으로 일제에 연행되어 구류생활을 해야 했다. 신사참배 강요의 시국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그는 천안읍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었는데, 감리교의 대세와는 달리 신사참배 거부의 뜻을 분명히 했다. 이에 일제는 1938년 초부터 사흘이 멀다 하고 그를 호출하여 위협과 회유를 일삼았다. 하지만 그가 뜻을 굽히지 않자 일제는 7월에 투옥하고, 그의 굴복을 받아내기 위해 온갖 혹독한 수단으로 고문했다. 이미 환갑을 부쩍 넘겨버린 노구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난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주어진 십자가를 걸머졌다. 몸소 체험했던 십자가의 능력이 그에게 있었던 것이다.

사실 신사참배 거부자들에게서 나타나는 하나의 공통점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체험적 신앙이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머리로만 아니라 가슴으로도 만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실존은 그들의 의식 속에 깊이 각인되었고, 그것이 현실 속에서 오직 여호와의 신앙, 곧 신사참배 거부신앙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신 목사의 올곧은 신앙 또한 여러 차례에 걸친 하나님 체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특히 1937년의 체험은 그가 하나님과 민족 그리고 교회 앞에 부끄럽지 않은 역사를 남길 수 있도록 이끌었다. 그는 50세경부터 한가지 시험에 들게 되었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걱정이었다. 그때까지 그는 집 한 칸이나 땅 한 평도 마련해 놓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부업이나 그 밖의 여러가지 일에 대한 생각으로 사역에 방해를 받기도 했다. 물론 그런 생각을 물리치기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악마의 유혹은 기회만 있으면 다시 침투하여 끈질기게 그를 물고 늘어졌다.

그러기를 10여년 마침내 그가 이 문제로부터 해방하게 되는 날이 찾아왔다. 그의 나이 63세 되던 해(1937)였다. 그가 섬기던 천안읍교회에서 개최된 부흥회가 승전의 계기가 되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처한 경제적인 문제로 고민하는 중이었다. 목회에 헌신한 지 30년이 지났고, 환갑이 넘었지만 여전히 빈곤상태에 있는 자신의 처지가 못내 부끄럽기도 했던 것이다. 물론 그가 경제적 부요를 누리기 위해 사역의 길로 헌신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가끔 자신의 형편에 서글퍼졌던 것도 사실이다.

어느날 새벽, 신 목사가 그런 침잠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중이었다. 그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네게 좋은 집을 주지 아니하고 내가 지던 십자가를 주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깊은 감격에 빠져 들었다. 실제로 그 음성은 지금까지 그가 들어왔던 어떤 음성보다 더 큰 은혜를 끼쳤다. 그날의 감격은 그가 그동안 겪었던 모든 시련과 가난의 아픔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시련과 가난과 멸시 속에 지나온 지난 세월이 십자가의 은혜였음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자서전>에 이렇게 적고 있다. “이 음성을 들을 때 너무 감격하여 많이 울었다. 내가 어찌 감히 주님의 지시던 십자가를 질 수 있을까. 이는 나의 영광 중에 가장 큰 영광이다. 다른 사람은 십자가를 괴로운 것으로 알런지 모르나 나에게는 영광의 십자가이다.”

이때 체험한 십자가 은혜는 그의 남은 생애를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이는 그의 친구 정춘수가 혁신교단을 이끌고 친일로 노정하며 비굴한 변절의 역사를 새겨갈 때에도, 그가 휘지 않고 올곧게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 있던 원천이었다. 나아가 이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그가 “둥근 원, 그 안에 진리가 있습니다. 원은 시작한 점에서 끝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잃어버린 나라를 찾을 때가 멀지 않았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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