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명섭 박사의 이야기를 통해 보는 한국교회의 역사 [60]
한국교회는 대체로 1884년을 그 원년으로 잡는다. 이는 그해 6월말에 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R. S. Maclay)가 선교의 가능성 여부를 타진하기 위해 방한하였고, 9월에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알렌(H. N. Allen)이 최초의 상주 선교사로 입국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그 이전부터 국내에도 기독교의 복음이 수용되어 간헐적이기는 하지만 자생적 공동체를 형성하며 전파되고 있었다. 그리고 국외에서도 몇몇 한국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한 후 세례를 받고, 선교사들을 도와 성경을 번역하고, 한국교회를 형성하고, 선교사 유치운동을 벌이는 등 실제적인 복음전파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일본에서 있었던 이수정(李樹廷, 1843-1886)의 개종과 활동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조선교회의 선구자가 되는 마케도니아 사람의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이수정은 한국의 기독교 수용과 관련해 몇 가지 점에서 크게 공헌했다. 무엇보다도 그의 성경번역을 들 수 있는데, 이는 한국교회가 성경중심의 신앙을 구현할 수 있는 하나의 토대를 제공했다.
기독교로 개종한 후 이수정의 최대 소망은 성경을 조선민족에게 주는 것이었다. 이는 그의 회심에도 결정적으로 작용했던 신비한 꿈이 계기가 되었다. 이수정은 홍문관 관리로 있던 중 일어난 임오군란 때, 위기에 처한 중전 민 씨를 구출한 공으로 신사유람단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1882년 9월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의 개화된 선진문물과 농업기술을 시찰하고 연구할 목적이었다. 물론 그 여정에는 친구 안종수가 소개해 준 츠다센(津田仙) 박사와의 만남도 잡혀 있었다. 츠다센 박사는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매우 유명한 농학자였다.
츠다센 박사를 만난 이수정은 그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았고, 신약성경도 선물로 받게 되었다. 이수정은 그 성경을 읽던 중 하루는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다. 꿈 속에 두 사람이 나타났는데, 한 사람은 키가 크고 다른 사람은 작았다. 이수정을 찾아온 그들은 자신들이 걸머지고 온 보따리를 벗어 주었다. 그가 “이것이 무엇이냐”하고 묻자, 그들은 ‘책’이라고 대답했다. 이에 그가 “이 책이 무엇이냐?”고 묻자, “이 책들은 당신 나라의 모든 책들보다도 가장 중요한 책들이다”라고 그들이 답하였다. 이에 그가 “그것이 무슨 책인데 그러느냐?”고 묻자, 그들은 “성경책이다”라고 했다.
꿈에서 깨어난 이수정은 큰 충격을 받았다.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책, 성경책.” 꿈에서 본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말과 또 그 보따리 속에 가득 들어 있던 책들을 도무지 잊을 수가 없었다. 그 꿈이 마치 하나의 신비적인 계시처럼 여겨졌다. 이를 계기로 그는 자원하여 예수를 믿게 되었고, 이어 1883년 4월 29일 부활절에는 야스가와(安川亭) 목사와 조지 낙스(George W. Knox) 선교사의 입회 하에 로겟츠죠교회(露月町敎會)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는 일본에서 거행된 조선인 최초의 세례였다. 그가 일본으로 건너간 지 7개월 만이며, 그때 그의 나이 40세였다. 비록 이수정의 세례가 이국 땅에서 행해진 일이기는 했지만, 아직 조선정부가 기독교 수용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고, 또한 그가 정부의 고급 관료였다는 사회적 정치적 신분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목숨을 걸었던 것과 진배 없었다.
이 사건은 일본 기독교인들은 물론 재일선교사들에게 큰 기대와 감흥을 일으켰다. 이 소식은 일본의 「칠일잡지」(七一雜誌) 제19호 (1883. 5. 11)에 자세히 실릴 정도였다. 더구나 그들은 베일 속에 쌓인 신비의 나라로 알려진 조선에 선교할 기회를 다각도로 모색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재일 미국성서공회 총무 루미스(H. Loomis)는 이수정의 개종을 “근대선교사상 가장 괄목할만한 사건으로 너무 좋아 믿어지지 않을 정도”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기독교로 개종한 후 이수정은 “조선의 복음화를 위해 성경을 번역하라”는 하나님의 음성과 루미스 선교사의 제안으로 성경번역에 착수했다. 성경은 이수정을 회심하도록 이끈 도구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보기에 천주교가 조선 선교에서 실패한 것도 성경이 없는 선교를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가톨릭 선교사들이 조선 민족에게 성경의 말씀을 맛보지 못하게 한 것은 중대한 잘못이었다(이덕주, 105). 따라서 이수정은 무엇보다도 성경을 조선민족에게 주고자 했으며, 그것은 그의 최대의 관심사이기도 했다.
이수정의 성경번역은 소위 현토성경(懸吐聖經)의 형태로 시작되었다. 이는 한문성경에 토를 다는 이른바 한한성경(漢韓聖經)으로, 당시 한국의 식자층에 인기가 있던 방법이었다. 1883년 5월에 시작된 현토성경은 그해 6월말까지 신약전체를 완성할 수 있었다. 현토성경은 이후의 번역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당시 동경의 유학생에게는 물론 국내에 유입되어 지식층의 환영을 받기도 했다.
이수정은 현토성경이 끝난 6월말부터 마가복음을 택하여 한글성경 번역에 들어갔다. 이는 이듬해 4월에 완역되었고, 인쇄소 사정 등으로 간행이 지체되다가 1885년 2월 요코하마에서 1천부가 발행되었다. 이수정은 후에 누가복음도 번역했으나 출판되지 않았고, 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의 요청으로 <감리교 요리문답>도 번역하여 1천부가 출판돼 국내에 널리 유포되었다.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의 출판은 한국 선교사로 임명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일본에 도착하는 때를 맞춘 것이었다. 요코하마에 도착한 그들은 이수정으로부터 2개월 간 한국어를 배우고 그해 4월 5일 부활절에 제물포에 도착했던 것이다. 이때 그들의 손에는 바로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이 들려 있었다. 이수정의 성경번역이 그들을 비롯해 이후에 오는 내한 선교사들이 보다 빠르고 쉽게 선교활동을 벌일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해 준 셈이다.
이처럼 한국의 기독교 수용은 먼 이국 땅에서부터 착실히 준비되고 있었다. 물론 그 중심에는 성경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믿음의 실체를 체험한 복음의 선각자들이 민족복음화를 위해 무엇보다 성경보급이 시급함을 깨달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성경번역을 그들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사명으로 삼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