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명섭 박사의 이야기를 통해 보는 한국교회의 역사[69]
역사의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에게 말을 걸다 보면, 간혹 미처 피우지 못한 꽃들로 인해 아쉬움을 남겨주는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특히 그 대상이 하나님의 대사였다는 확신이 드는 경우에는 아쉬움으로 인한 빈 공간은 더욱 커지게 된다. 부산지역에 한국선교를 위한 둥지를 마련하고자 했던 헨리 데이비스(Joseph Henry Davies, 1856-1890) 선교사 또한 그러한 예에 속한다. 그는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PCV)가 파송한 최초의 한국선교사였다.
데이비스는 한국에 오기 전에 이미 인도선교의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는 20세 초반에 선교에 대한 비전과 열정에 붙잡혀 장래가 보장되던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인도로 향했다. 그런데 말라리아에 감염되는 바람에 1년 반 만에 귀향해야 했다. 뜻하지 않은 시련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그만둘 수 없었다. 당장은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데이비스는 이후의 시간들을 더욱 자신을 알차게 준비하는 기회로 삼고자 했다.
귀국 후, 그는 멜버른대학교에 입학해 학사학위와 석사학위로 마쳤다. 그리고 그곳을 졸업한 후에는 사립학교를 설립하고 25세의 나이에 교장에 취임하여 매우 성공적으로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만족할 수 없었다. 선교의 사명이 그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그는 중국 푸초(福州)지역에 선교하던 영국성공회의 월프(Rev. John R. Wolfe) 선교사가 [국내 및 해외선교]라는 집지에 기고한 글을 통해 한국선교의 긴급성과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에 그는 성공회를 통해 그 가능성을 타진했다. 하지만 성공회에서는 목사가 아니면 선교사로 보낼 수가 없다고 했다. 어렵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멈출 데이비스는 아니었다. 그는 좌절하지 않고 호주 장로교회의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장로교회도 한국선교의 필요성은 인정했지만 상황논리를 내세우며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때문에 장로교회는 데이비스를 선교사로 인준해 놓고도 구체적인 재정 지원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기도하는 곳에 길이 열린다고 했던가. 막다른 상황에서 뜻밖에도 청년연합회(YMFU)가 데이비스의 선교를 지원키로 결의한 것이다.
이에 데이비스는 그의 누이 메리 데이비스(1853-1941)와 함께 1889년 8월 21일에 멜버른을 출발하여 서울에는 10월 5일에 도착했다. 데이비스는 이때부터 5개월 동안 서울에 머물면서 한국어 학습에 진력하는 한편, 내한선교사 및 한국인 전도자들과 함께 서울 인접지역으로 전도여행을 하면서 한국의 풍습도 익혀나갔다. 이때 데이비스와 많은 시간을 함께했던 언더우드는 “그는 활동가요 다방면에 재주를 가진 믿음의 사람이요 내한선교사 중에 뛰어난 인재 중의 하나”라고 호평했다.
당시 서울에는 데이비스와 비슷한 시기에 입국한 20여명의 선교사들이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이북지역으로 선교지평을 넓혀가고자 했다. 하지만 데이비스는 이남지역, 곧 부산에 선교거점을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부산이 한국의 대표적인 항구도시로 한국의 관문이며, 일본과 인접해 있어 보다 효과적인 선교가 가능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1890년 3월, 그는 어학선생 및 비서와 함께 성경, 전도지, 소책자, 의약품 등을 준비하고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향했다. 그 여정에 그는 이남지역의 거점 부락들을 들러 복음을 전할 계획도 세웠다. 그것은 그가 호주에 있을 때부터 꿈꾸던 일이기도 했다.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그도 각 마을을 다니며 전도하는 것을 꿈꾸었던 것이다. 그는 이제 한반도에서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이에 그는 경기도 수원, 충청도 공주, 전라도 남원, 경상도 하동과 사천 등을 답사하며, 가는 곳마다 성경과 소책자 등을 팔고 전도지를 나눠주며 복음을 전했다. 거의 20일 동안 500km나 되는 대장정을 도보로 완주하고 드디어 부산에 도착했다.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소위 땅 밟기를 통해 주님의 주권을 선포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데이비스는 무리한 도보여행으로 급격히 몸이 약해져 천연두에 감염되었고, 급성폐렴까지 겹쳐 마지막 5일간은 거의 아무것도 먹지를 못한 상태였다.
그가 그런 상태로 부산에 도착한 것은 1890년 4월 4일이었다. 데이비스의 급보를 받은 게일(J. S. Gale) 선교사는 즉시 그를 찾아가 자신의 거처로 옮기고 극진히 보살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다음날 그는 세상을 뜨고 말았다. 게일은 그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적고 있다. “오후 한 시경에 평안한 모습으로 하나님 곁으로 갔다.”게일은 그의 시신을 부산 복병산 기슭에 묻었고, 그의 묘비에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 죽는 것도 유익하다”(To Live Christ To Die Gain)라고 새겨졌다. 그가 한국에 온지 6개월 만의 일이었다.
데이비스는 부산선교의 위대한 꿈을 안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그는 그 꿈을 미처 피워보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그의 죽음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의 죽음은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과 같은 것이었다. 그로 인해 호주교회는 한국선교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결과 1891년 10월에는 멕케이(J. Mackay) 목사를 비롯해 모두 5명의 선교사가 제2진으로 내한하게 되었다. 그리고 훗날에는 데이비스의 두 조카까지도 내한선교사로 활동하게 되는 밑거름이 된 것이다. 눈앞에 있는 안위만을 생각하고자 해서야 어찌 주님의 부르심에 합한 자가 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