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회 중 김광식 교수는 ‘십자가의 어리석은 도’를 말하며 “설교자의 사명은 신자를 지혜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을 체험하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도올은 “이해없는 신앙을 21세기에 고집할 수 없다”며 “그런 나약한 태도가 지금 이 모양의 교회를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소위 도올이 말하는 이해란, 믿음 위에서 이뤄지는 신자의 신앙적 변증이 아닌 자기 사상 속에서 이뤄지는 불신자의 궤변에 가깝다. 믿는 자에게 예수의 죽음은 대속이라는 사실은 체험적 진리다. 그러나 도올은 예수의 대속 문제에 관해 “예수가 죄를 다 대속했다면 왜 더 이상은 죄가 없는 인간이 기독교를 믿어야 하냐”고 되물으며 “예수는 인간을 대속하지 않았고 대속은 인류의 책임”이라고 단정한다.
그가 말하는 이해가 이런 개념이라면 그가 보는 성경 역시도 역사비평적, 고등비평적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 그는 기독교인의 어리석어 보이는 믿음에 대해 그것을 나약한 태도라고 비판하지만 도올이 현 21세기에 사용하고 있는 비평의 방법은 기독교가 이미 19세기에 다 써 먹었던 것이며 결국 “이건 아니다”라는 결론에 귀결한 구식 비평이다. 19세기의 똑똑해지려던 기독교는 20세기에 들어와 결국 하나님의 말씀 앞에 다시 무릎을 꿇고야 말았다. 이런 어리석고 나약한 태도가 오히려 진실된 것임을 인류는 깨달았으며 이것은 도올이 아무리 비판을 해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경험이었다. 21세기에 닥쳐오는 포스트모더니즘도 창조주 하나님 앞에 도전장을 던지지만 대결의 결론은 자명하다.
그는 또 기독교는 형성되어가고 있으며 어느 한 시점의 모습이 기독교의 기준이 될 수 없다면서 성경도 그러하다고 말한다. 일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형성을 이야기하려면 그리스도와 복음의 초문화적 특성과 문화적 특성을 동시에 전제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계시로서 초문화적이며 초월적이며 불변하는 존재였지만 동시에 그리스도는 인간이셨고 당시의 문화 속에서 유대인이 되어 옷을 입고 음식을 드시고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는 등 문화적이었으며 인류에 구속된 종이셨고 매일매일 가변하는 일상을 사셨다. 그리스도의 초문화적 현현에서는 도올이 말하는 형성이라는 단어가 사용될 수 없으며 오로지 문화적 현현에서만 가능하다. 도올이 적어도 기독교의 기준이나 교회의 기준, 성경의 기준을 말하려면, 2천년 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는 자신을 세계적 고전학자라 자칭했지만 성경에 정본이 없다는 그의 말은 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 가변하는 인간의 언어와 해석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
도올은 자신이 주장했던 구약폐기론에 대해서 “율법이 아닌 율법주의를 거부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는 요한복음 강의에서 특정 이단이 헌금을 강요하는 것을 마치 모든 교회가 그러한 것처럼 비판한 바 있다. 이번 토론에서도 여지없이 십일조 문제를 지적했다. 그는 마치 교회가 십일조를 내라고 하는 것이 율법주의인 것처럼 설명한다. 도올은 특히 예수께서 십일조를 하라고 한 적이 없다고 했는데 마23:23에서 예수님은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하셨다. 다만, 십일조보다 중요한 의(義)와 인(仁)과 신(信)을 강조하셨을 뿐이다. 또 예수께서는 마5:17에서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 왔다”고 스스로 말씀하셨고 우리는 예수를 통해 완성된 율법을 복음이라고 부른다.
토론을 마친 후, 우리는 우리 자신이 여전히 어리석을 수밖에 없고 각종 문제점들을 안고 있는 인간일 뿐임을 알게 됐다. 또 지혜있는 자, 선비, 변사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하나님의 지혜만이 우리에겐 답이 됨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