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 그 새로운 조명 3] 일산광림교회 박동찬 목사
금년은 평양 대부흥 1백주년을 기념하는 해인지라 곳곳에서 많은 집회가 열리고 있다. 크고 작은 집회들마다의 주제와 특성을 살펴보면 주로 ‘부흥’이라는 큰 주제 속에서 회개와 연합, 기도와 기념행사, 그리고 비전선포나 기독인의 결단을 다짐하는 선언서 낭독 등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부흥 1백주년을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아무런 기념집회 없이 조용히 지나가는 것도 문제겠지만 반면에 크고 작은 집회와 행사로만 끝난다면 거기에도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순간순간 터져 나오는 사회의 뜨거운 이슈와 그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는 교회의 역할부재는, 이제 부흥을 간절히 사모해야 할 시점에 우리가 서 있음을 일깨워주는 이정표가 되고 있다. 우리 세대는 어린 유년시절부터 ‘부흥’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라온 터라 ‘부흥’하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고 중요한 것이란 생각을 생활의 저변에 깔게 되었다. 그러나 부흥 1백주년을 맞아 이곳 저곳에서 본격적(?)으로 ‘부흥’을 외치고 있으니 다소 혼란스럽게 느껴지는 부분도 없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렇든 저렇든 ‘부흥’은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과제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지향하고 목표하는 부흥은 어떤 부흥인가? 우리가 바라고 소망하는 부흥의 밑그림이나 아무런 청사진도 없이 부흥을 외쳐댄다면 그것은 의미 없는 공허한 외침이나 한 순간의 해프닝으로 끝나 버리고 말 것이라는 우려도 없지 않다. 오늘 우리가 추구해야 할 부흥, 많은 한국의 기독인들이 기도하며 소망하는 부흥은 어떤 부흥이어야 하는가?
‘부흥’(Revival)이란 문자적 의미로 ‘다시 살아난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그런데, ‘다시 산다’라는 말 속에는 먼저 두 가지 사실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첫째는 ‘살아 있었다’는 과거의 상태와 ‘죽었다’는 현재의 상태를 인정하는 일이다. 죽지도 않았는데 다시 살아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사실이 인정될 때 비로소 ‘부흥’은 이야기 될 수가 있는 것이다.
과거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교회가 살아 있었던 시대를 말할 때 흔히 ‘초대교회’를 거론 한다. 초대교회를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첫째로 성령의 뜨거운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요, 둘째는 말씀과 기도, 성도의 교제가 있었으며, 셋째는 사회를 향한 나눔과 섬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들을 통해 교회는 활기를 띠어갔고 세상으로부터 칭찬의 소리가 높아졌으며, 그로인해 구원받는 백성의 수가 늘어가게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현대의 교회를 향해 “침체되었다”거나 더 심한 표현으로 “죽었다”고 말하는 이유는 초대 교회의 생동하던 요인들을 현대 교회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다시 ‘부흥’을 이야기해보자. 한국 교회는 다시 살아나야 한다. ‘부흥’되어야 하며, 원래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 절실한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이다. 사람은 항상 자기 생각의 지배를 받게 마련이다. 그런데 부흥은 우리의 생각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러므로 내 생각과 내 가치관을 겸손히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한다. 성령의 도우심을 따르게 될 때 흙이 사람이 되어 살듯이, 또 죽음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군대가 되어 살아나듯이 새롭게 사는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둘째는, 세상을 향한 섬김과 나눔이 각자의 교회에서 실천되어야 한다. 교회는 항상 ‘사랑’을 외치지만 ‘실천’이 없는 까닭에 항상 그 외침은 공허한 것이 되고 말았다. 사랑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포장되어 질 때 진가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우리는 부흥을 사모해야 하는가? ‘부흥’의 이면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부흥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릴 ‘빛’이며 ‘소금’으로 부르셨다. 그 이유는 세상을 변화시킬 책임이 우리에게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빛은 어둠을 변화시켜 밝게 만들고, 소금은 무미한 음식을 맛있는 것으로 변화시킨다. 부흥을 이야기하면서 변화를 꿈꾸지 않는다면 그 부흥은 생명 없는 죽은 씨앗이 되고 만다. 성도들의 신앙이 자라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세상을 변화시킬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부흥되어야 하고, 교회가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이유도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흥은 변화를 위한 촉매제이다. 변화산에서 거기 머물겠다는 제자들의 요청에 대해 예수님은 단호하게 세상으로 내려 갈 것을 말씀하셨다. 세상에서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자기만 좋으면 된다는 제자들의 사고방식을 바꾸셔서 세상을 돌아보게 하셨고, 그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죽음의 길을 걷게 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부흥의 길은 죽음의 길이요 십자가의 길이다. 부흥을 값싼 해프닝이나 행사치례로 끝내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