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 그 새로운 조명 8] 성결대학교 배본철 교수
지난번까지의 글에서 필자는 부흥 이후의 신학은 어떤 양상을 지니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그리고 진정한 부흥을 분별할 수 있는 핵심가치는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필자가 부흥을 논하면서 부흥의 성격을 먼저 규정하게 된 것은, 한국교회가 부흥에 대한 어떤 맹목적이거나 허황된 신기루를 찾아 헤맬 것이 아니라 분명한 부흥의 실제를 확인하고 이를 목표로 해서 달려가야 하겠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제 필자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부흥의 진면목이 선명하게 다가오게 되었다면, 이제부터 말하고 싶은 것은 부흥의 원동력은 바로 성령의 권능을 통해서만 주어진다는 점에 대해서다. 생각해 보라.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시기 전 주 예수께서 그처럼 강조해서 부탁하신 말씀이 ‘성령의 권능을 받으라’는 것이었고, 초대교회가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삶과 사역에 바로 성령의 권능이 나타났기 때문이었으며, 또 20세기의 처음 10년 동안에 있었던 웨일즈(Wales)나 아주사(Azusa)나 인도의 부흥운동 그리고 평양의 대부흥운동은 모두 성령의 권능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 아니었는가? 그 어떤 다른 여러 요소들을 총동원할지라도 부흥이 일어남에 있어서 성령의 권능이라는 원동력을 대치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이처럼 21세기를 맞이한 오늘날도 한국교회의 새로운 부흥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원동력은 성령의 권능이라는 점을 우리는 겸허하게 시인해야 한다.
그런데 이 성령의 권능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필자는 먼저 신자들이 미혹되기 쉬운 잘못된 영성운동의 방향 몇 가지를 지적하고 넘어가야 하겠다. 왜냐하면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러한 극단적인 성격의 영성운동들로 인해 피해를 보게 되는 사례가 대단히 많기 때문이다.
첫째는, 육감적 체험주의를 자극하는 영성운동을 경계해야 한다. 육감적 체험주의란 신체의 시청각적 기능이나 느낌 등을 통해 확인되는 현상적 차원에 너무 중점을 두는 영성운동을 말한다. 성령의 권능이 부여될 때 현상적 차원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말이지만 그러나 그러한 현상이 성령의 권능 그 자체는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확실히 해야 한다. 성령의 권능은 우리 영혼의 본질에 접근하여 본질적인 회복과 변화 그리고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권능은 권능 받은 이후의 삶과 사역을 통해 뚜렷이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상적 차원은 현상 그대로 끝나는 것이지 거기에 필연적인 본질적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는 말이다. 요즘 새롭게 문제시되고 있는 ‘금이빨’ 사건이나 ‘쓰러짐’ 현상에 대한 신학계의 비판은 이런 점에서 그 정당한 비판의 근거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성운동의 지도자들은 영성운동의 본질적 차원과 현상적 차원을 잘 구별하여 언제나 본질적 차원의 능력을 심화시키는 일에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둘째는, 기복주의에 호소하는 영성운동을 경계해야 한다. 오늘날 신유집회, 은사집회 등을 운운하면서 정작은 인간적 욕구와 필요를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고귀하신 성령님의 이름을 남용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집회에 성령의 권능이 임할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성령의 은사와 나타남은 교회의 유익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인데, 과연 기복주의에 만연되어 있는 모임 속에 성령의 주권과 인도하심이 나타나겠는가? 오히려 성령을 가장한 미혹의 영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영성의 증진은 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얼마나 더 얻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내가 주님 앞에 회개하여 비워질 수 있느냐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셋째는, 진정한 성령의 능력과는 거리가 먼 인위적인 영성운동을 경계해야 한다. 종종 호화스런 무대와 강사진 그리고 멋들어진 시스템 등이 성령의 자리를 대치할 때가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수많은 신자들이 동원된 대규모 집회의 내용 속에도 본질적인 성령의 권능이 결여될 수도 있다는 점도 아울러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들은 성령의 권능을 초청함에 있어서 상황에 따라 하나의 필요조건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충분조건은 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의 권능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권능을 받는’(행 1:8), ‘위로부터 오는 능력’(눅 24:49)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성령의 권능, 그것은 내향적 차원과 외향적 차원으로 설명될 수 있다. 먼저 성령의 권능의 내향적 차원은 나 자신에 대해 죽고 주님을 향해 살아가는 능력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미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 성령의 권능은 이 영적 사실을 우리의 경험 속에 구현시키는 힘이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전인적인 사랑과 마음의 정결을 가져온다. 그리고 그 힘은 교회와 신자 개개인의 삶을 ‘그리스도 닮기’를 향해 성화시켜 가는 길로 이끄시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권능의 외향적 차원이 있다. 성령께서 신자들 속에서 능력으로 나타나시는 이유는 세계 복음화의 비전과 직결된다. 따라서 성령 받은 이들은 사실상 권능을 받은 이들이고 권능 받은 이들은 또한 세계 복음화의 증인들이다(행 1:8). 그러므로 신자들의 삶과 사역을 통해 드러나는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은 복음이 말로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전파되는 것임을 세계 속에 증거하며 나아가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다움’에 대한 정체성의 위기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한국교회를 위한 가장 훌륭한 처방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확신하건데 그것은 우리가 진정 ‘내려놓음’의 자리에 들어가 성령의 권능을 받고 그 능력 가운데서 살아가는 일이다. 이 길만이 한국교회가 그리스도 닮은 교회가 되어 세상 속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는 길이요 또한 세계 복음화 완수를 힘 있게 담당할 수 있는 힘있는 교회로서 발돋움하는 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