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 그 새로운 조명 13] 이동현 목사
지난 2007년은 어느 해보다 부흥에 대한 관심과 노력이 깊었던 한해였던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 ‘부흥’은 2007년 한국교회의 트렌드였다. 많은 교회와 단체들이 ‘부흥’을 이야기했고, 부흥을 위해 뭔가를 했다.
지나온 부흥의 열풍 속에서 나도 부흥을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고, 기도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드는 의구심은 “과연 우리가 생각하고 기대한대로 부흥이 찾아올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현실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소문난 방식으로 부흥이 올 것인가? ‘정말 참된 부흥’ 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혹 우리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부흥이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질문들을 계속 던지며 나는 2007년을 지나왔다.
2007년을 마치면서 우리는 적어도 현상적으로 손에 잡히는 ‘분명한 무엇’을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부흥의 갈망이 참된 것이라면, 이미 그 부흥은 시작됐는지 모른다.
이런 관점에서 ‘오순절의 성령강림’, 그 최초의 부흥을 우리는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도행전 1장 6절에서 제자들은 승천하시기 직전 예수님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라고 묻는다. 성령의 오심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신 주님께 제자들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이야기한다. 제자들이 묻는 ‘이스라엘의 회복’은 물론 율법적인 것이다. 주님의 사역과 죽으심과 부활을 체험하고도, 그들의 관심은 다윗과 솔로몬의 왕국을 다시 이 땅에 재현될 유대 나라의 회복에 맞춰져 있었다.
이 물음에 주님은 단호히 대답하신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이 말씀은 거기에 관심을 두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8절의 명령이 나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요약하면, 이 땅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에는 관심두지 말고, 성령을 받고 증인되는 것에 온 힘을 쏟으라는 것이다.
제자들을 포함한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을 육적으로 재건할 메시야를 수천 년 동안 기다려 왔다. 그런데 그 메시야는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심을 두지 말라고 명령하고 계신다. 그들이 바라던 부흥과, 메시야가 주려고 했던 부흥은 달랐다.
어떤 의미에서 오순절 성령강림과 그에 따른 부흥의 가장 앞선 전제는 수천 년 동안 고착됐던 메시아의 역할과 그에 대한 기대가 깨지는 것이었다. 지난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부흥이 일어날 때는 고착된 상식이 깨지는 ‘관점의 전이’가 항상 있어 왔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이런 과정 속에서 ‘부흥’이 트렌드가 되어버린 2007년, 우리가 바랬던 부흥의 모습이 어떤것이었나를 살펴봐야 한다. 교회의 세력이 커지고, 성공과 번영주의 신학이 판을 치는 우리의 모습 속에서 더 큰 교회, 더 큰 번영의 가시적 현상이 우리가 바랬던 부흥은 아니었는가를 생각해 볼 때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나는 부흥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지난 몇 년 동안 사역의 현장에서 지금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기를 포기하고 십자가를 지는 작은 무리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성취나 회복되는 번영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증인 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는 새로운 움직임들이 밑바닥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모두가 부흥을 외치던 2007년이 지나갔다. 그러나 부흥을 향한 기대와 열정이 지나가 버리면 안 된다. 오히려 막연했던 그 ‘부흥’을 향한 움직임이 이제 새로운 ‘관점의 전이’를 통해서 바람직하게 개념정리가 돼야 할 때이다. 부족하지만 나는 아직도 청소년 아이들과 함께 아침 저녁으로 더 뜨겁게 ‘부흥’을 갈망하며 매일 기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