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벼락과 물벼락도 맞고…
낯선 곳에서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은 나로 더욱 분발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성취하도록 전진하게 도울 뿐이다.카트만두에서
1998년 3월 10일, 카트만두 가는 비행기 안에서
기도하고 찬송을 불렀다. 기도는 주로 주님만 온전히 사랑하며 따를 수 있도록, 더욱 그 분 자신으로 나를 매혹시켜 달라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더욱 강권케 해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네팔에는 이번이 여섯번째인데 주님과 함께 가기 원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주여! 당신의 원함을, 뜻을 당신이 이루소서”
이 찬송은 델리 형제들이 애창하여 부르는 것이다.
Create on me a clean heart oh, God
And renew a right spirit within me(×2)
Cast me not away from Thy presence oh, Lord!
And take not Thy Holy Spirit from me
Restore unto me the joy of Thy salvation
And renew a right spirit within me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눈 덮인 아름다운 히말라야가 보인다. 매우 높고 아름답다.
사역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언변이나 지식과 은사가 좋은 사람이 말씀을 잘 전하는 것이 사역이 아니다. 사역은 생명의 공급이다. 생명은 그 사람이 어떠냐에 달려 있다. 하나님 앞에서 많은 처리를 받아야 사역이 있는 사람이 된다. 많은 환경 안에서의 다룸이 십자가의 역사로 그 사람을 헐고 새로운 성령의 조성이 생겨나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문제를 예로 들자면, 이러한 부분이 처리를 받는 날 그리스도의 성분이 사람 속에 깊이 새겨지게 된다. 그러나 사람은 그대로 있고 많은 지식만 쌓는다면 그 사람의 사역은 공허한 것이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할 뿐이다. 불을 통과하지 않고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 얻은 것들은 지식 안에 머물 뿐 우리 안에 생명이 되지 못한다. 믿음도 그러하고 헌신도 그러하고 기도도 그러하다.
오늘날 내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밖에서 가진 지식으로 만족하며 아는 것이 소유한 것인 양 착각한다는 것이다. 대가와 고난을 거치지 않고도 얼마든지 풍성한 생명을 얻고 이기는 자들이 되리라고 기대하는 것 같다. 이것은 큰 속임수다. 진정한 능력은 범사에 성령을 따라 살며 그분을 기쁘게 하기 위해 자신을 사지(死地)에 두며 기꺼이 고난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법이다.
이것이 길일진대 더 많은 방면에서 십자가의 처리를 받아 순종의 길을 걷고 더욱 더 헌신하여 이 시대에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필요를 공급할 수 있는 풍성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얼마나 갈망하는지!
3월 11일, 더러운 귀신
오늘 카트만두 교외를 산보하러 나갔다가 물벼락과 똥벼락을 맞았다. 힌두교 축제는 휴일도 많고 전통과 관습도 많은데 오늘은 풍선에 물을 넣어 고층 건물에서 거리의 행객들에게 물벼락을 주는 날이란다. 내일은 색깔을 탄 물을 던져댄단다. 한 번 벼락을 맞는 날이면 옷을 왕창 버린다. 다행히 물은 나를 맞추지 못하고 나와 Y형제 앞에 떨어졌다. 그런데 오다가 똥벼락을 맞았는데 목에 뭔가 더러운 것이 만져졌다. 씻었다. 다행히 거리에 물이 나오는 파이프가 있었다. 지금 우리가 머무는 집은 그나마 단수라서 목욕을 할 수도 없다.
이러한 더러운 장난을 하는 자가 누구인가? 바로 귀신이다. 그래서 성경은 귀신을 더러운 귀신(unclean spirit)이라고 명했을 것이다. 귀신은 매우 조잡하고 더러운 일을 많이 한다. 한 찬송가 가사는 무겁고 무거운 짐을 주께서 지셨을 때 그분은 귀신의 비웃음을 감당하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천지의 하나님의 종들이다.
성경 묵상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행 10:13)”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민 14:9)”
두 구절 모두 우리에게 적극적이고 담대해야 할 필요를 일깨워준다. 소극적인 사람은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 복음 전파를 위해,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담대하고 적극적으로 돌파하는 영이다. “그들은 우리 밥이다!”, “일어나 잡아 먹어라!”
결국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가나안은 정복되고, 베드로와 같이 옛 관념을 과감히 깨고 이방인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시대를 바꾸는 사람들로서 이 시대에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만이 그분의 일을 전진시켜 나가실 수 있다.
내가 델리에서 체험한 것은 악한 영이었다(evil spirit). 그 밤에 가위눌렸고 밤새 고양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서 마치 도둑이나 강도 소리같이 들려 사람을 긴장시켰다(J형제, J자매가 전날 음식 쓰레기를 집회장소 밖에 버려둔 것을 고양이가 뒤지는 것이었다).
또 두 번이나 크게 미끄러져 거의 죽을 뻔했다. 사실 화장실에서 미끄러졌을 때나(시멘트 모서리에 머리가 부딪힐 뻔…) 예배 장소 바닥에서 미끄러졌을 때 두 번 다 죽음이 매우 가깝게 느껴졌다. 즉시 느낀 것은 죽을 뻔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 지키셨다는 것이다. 두 가지 느낌이 교차했다. 감사가 나왔다. 캄캄한 밤에 아무도 없이 죽을 뻔했던 것이다. 또 델리 예배 장소는 두 번이나 도둑이 들어서 몇 가지를 잃어버렸다.
더러운 귀신과 악한 영의 장난은 나로 더 그분께 가까이 가게 할 뿐이다. 그리고 더욱 분발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성취하도록 전진하게 도울 뿐이다.
3월 12일, 끝까지 목숨을 다해 주님을 따르겠는가?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 22:16-18)”
아브라함은 왜 이렇게 큰 복의 출구가 됐는가? 그가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고(12절) 여호와의 음성을 순종하였기 때문이다(18절).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큰 봉사를 하고 싶어하지만,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지경을 할당해 주시기 원한 것은 그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순종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바울부터 역대로 자기 목숨까지 버리면서 주님을 따른 사람들은 열매가 많고, 많은 것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기셨다. 과연 당신은 끝까지 목숨을 다해 주님을 따르기 원하는가? 그러면 반드시 주님은 당신으로 사역의 열매를 많이 얻게 하실 것이고 필요하면 더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당신의 지경을 넓히시며 대적의 문을 얻게 하실 것이다.
오늘은 힌두 축제에서 사람들이 옥상에서 물감 섞인 물을 쏟아 붓는 날이란다. 자매들은 나오기가 어려웠다. 집회를 마치고 한 목사가 자신의 예배당에 나를 인도해서 가 보았다. 작은 집회 장소에 가난한 집이었고, 식구는 대여섯 명 됐다. 돌아오니 단전 단수가 되어 있었다. 점심도 못 먹어서 배는 고프고 밥은 없고 불은 나가고 물도 안 나왔다. 잠시 후에 딜립 형제가 와서 전기를 고쳐줘 불이 다시 들어왔다. 다시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우리는 조금의 배고픔과 불편도 견디기 어려워한다.
3월 13일, 카트만두 공항 대합실에서
오늘은 오전 열한시부터 한시 반까지 집회를 했다. 내용은 ‘하나님의 영원한 갈망은 교회를 얻는 것’이었다(마 16:16-18, 마 18장).
1. 그리스도의 몸은 생명의 완전한 표현(full grown man unto the fullness of Christ).
2.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분의 행정을 수행하기 원하신다.
묶고 푸는 문제를 많이 말했다. 머리와 몸이 동역해 묶고 푸는 것이다. 승천하신 하늘의 그리스도는 이 땅에 건축된 그분의 몸이 필요한 것이다. 사탄을 묶고 하나님의 진리와 생명은 풀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마태복음 18장은 어떻게 묶고 푸는가를 실행하는 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유동근 목사는